<나의 단약 다이어리>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

#병원줄서기 #나는미치지않았어 #병원은 단약을 권하지 않는다. #단약의지

by 산책이

제목 :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


정신과 병원은 크게 예약제와 비예약제로 나뉜다. 친구가 추천해 준 예약제 병원은 진료까지 두 달을 기다려야 했다. 원하는 요일과 시간을 맞추려면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나에게는 전혀 낯선, 처음 마주하는 병원의 세계였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에 다닌다고? 병원의 문턱이 낮아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줄을 서야 한다는 건 미처 상상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결심할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결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작 내가 원하는 의사 선생님을 마음 아픈 사람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은 묘한 동지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아픔이 특별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들게 했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병원은 마치 맛집처럼 줄을 서는 곳이었다. 나도 대기표를 받고 조용히 줄에 섰다.


진료를 결정했을 뿐, 치료가 시작된 건 아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무례함과 꼰대력 끝판왕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이 ‘선’을 세게 넘긴 날, 나는 결국 비예약제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제 병원을 기다리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약제와 비예약제의 차이를 정확히 몰랐다. 단순히 예약 여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도 또 다른 형태의 기다림이었다.

비예약제 병원의 문을 열자 진료실 밖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간 병원에서도 기다림은 피할 수 없었다. 예약제가 대기표를 받고 온라인으로 순서를 기다리는 느낌이라면, 비예약제는 오프라인에서 하염없이 내 차례를 기다리는 실전 그 자체였다.


그날 나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 눈물은 끊임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와중에도 불편함은 느꼈다. 자리가 좁아서가 아니라, 앉을 자리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동안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을 기다려 겨우 들어간 진료실 안에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뒤에 사람들이 줄 서 있다는 생각에 하고 싶은 말을 자꾸 삼켜야 했다. 핵심만 말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여기는 꾸준히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직감이 스쳤다. 올 때마다 한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몸도 힘들겠지만, 진료실 밖 사람들의 무언의 압박에 마음 놓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응급한 마음을 달래줄 약은 받을 수 있었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의사 선생님과의 짧은 상담 후, 내 손에 쥐어진 건 수면제와 신경안정제였다. 급한 대로 며칠 치만 처방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약을 받아서 기쁘기보다는 ‘일단 이 약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후로는 예약제 병원을 찾았다. 온라인으로 미리 줄을 서서 그런가, 진료실 밖 소파에는 늘 나 혼자였다. 처음엔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싶어 의아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게 바로 예약제의 장점이구나.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최소화됐다.


예약제 병원에서 초진을 무사히 마친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상태가 괜찮을 땐 2주일에 한 번씩 의사 선생님과 약속을 잡고 찾아갔다. 초진 이후로 상담이 10분을 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날의 컨디션과 주변 상황, 심리 상태를 이야기했고, 의사 선생님은 그에 맞춰 약을 처방해 주셨다.

정신과에 찾아가면 약물 처방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약을 먹고 싶어서 병원에 간 게 아니었다. 내가 겪는 우울감과 좌절감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게 의학적으로 증명받고 싶었다.


‘정상인 상태로는 그걸 버틸 수 없지. 미쳐도 못 버틸 일이다.’ 그런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의사 선생님이 내가 원하는 멘트를 해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던 그 조직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곳인지 첫 만남에서 명확히 짚어주었다. 그 말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했을 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꾸준히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약 2년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24개월 내내 빠짐없이 병원을 찾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두 번이나 함께 보냈다.

약을 먹어야 할 만큼 내 주변 환경은 너무 힘들었고, 나는 그걸 버텨낼 힘이 없었다. 상황을 바꾸려고 이것저것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노력하다 좌절하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무기력과 무망감만 남았다.


평온함이 0, 힘듦이 10이라면 약을 먹는 동안 내 마음은 주로 8과 9 사이를 진동했다. 다시 말해, 약 없이 버티면 8과 9를 헤맸지만 약을 먹으면 적어도 6이나 7까지는 내려갈 수 있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그동안의 힘듦을 토로했다. 그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약을 처방해 주셨다.


매번 진료실에서 힘든 삶을 털어놓는 내가 먼저였기에, 병원에서도 단약을 권할 이유는 없었다.

병원이 단약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진 않는다. 마음이 힘들 때 언제든 병원을 찾으라고, 약을 먹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콘텐츠는 많지만 ‘약을 줄이며 단약을 권한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의지는 내가 병원에 들고 가야 한다.


“저는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줄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건네는 순간, 비로소 의사 선생님과의 단약 상담이 시작된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니까, 괴로우니 약을 먹어야 해.’

하지만 단약을 결심한 후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니까, 약을 끊을 수 있어.’

‘내가 미친 게 아니다’라는 걸 증명받고 싶어 약을 먹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 약을 끊기로 했다.















keyword
월, 수, 토, 일 연재
이전 13화<나의 단약 다이어리> 힘든 일도 끝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