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마주하는 과정은 꽤 고통스럽다.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한번 부끄러워해야 하고, 어리석은 면을 어리석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더 마주하기 힘든 것 같다. 로버트 그린의 책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역할극을 하며 살아간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집단 대다수의 생각과 행동을 흉내 낸다. 또 당장의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본인의 생각을 숨기기도 한다. 무의식은 이런 가면들 속에 감싸져 있다. 몇 겹의 포장지로 싸인 상자 안의 선물처럼 꽁꽁 숨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은 바다 위의 빙하 같다. 의식은 수면 위로 드러난 일각이고, 거대한 무의식은 바다에 잠겨 있다. 둘의 상하관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수면 위 의식에 집중한다. 수면 아래 푸르른 빙하가 얼마나 거대한지 모른 채 살아간다. 드물지만 가끔 큰 파도가 빙하를 뒤집는다. 인생을 뒤바꿀 시련이나 위기가 찾아오면 비로소 무의식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잔한 파도에 흔들리며 그대로 살아간다. 종종 알코올이란 파도를 불러와 무의식을 잠깐 볼 수도 있다. 조용한 줄 알았던 사람이 술에 취하면 심한 욕을 하는 경우도 있고, 평소에 밝은 사람이 숨겨왔던 어두운 면을 내보이기도 한다. 무의식 속 진짜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알코올의 힘을 빌린 무의식은 쉽게 사라진다. 무의식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 정작 본인은 취해 있다. 그래서 온전히 인지하기 어렵다. 건강하게 내면의 무의식을 마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글쓰기다. 앞서 말했듯이 알코올을 통해 얻은 무의식은 포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낯설게 바라보아야 한다. 글쓰기는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을 포착할 수 있다. 또다시 읽으면 그때의 생각을 재평가할 수 있다. 뇌 안의 데이터만 잡아먹는 걱정이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던 행동의 원인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글쓰기의 좋은 점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빙하를 흔든 파도를 언제든 다시 불러올 수 있다.
문제는 글쓰기를 하는 도중에 의식이 끊임없이 훼방을 놓는다. 쉽게 무의식이 드러나지 못하게 굳건히 버티고 있다. 그래서 의식을 걷어내기 위해선 의식 속 자원을 고갈시켜야 한다. 종이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에 대해 100가지를 적어 보자. 예를 들면 내가 행복한 순간 100가지나 화났던 순간 100가지를 적어 보자. 아마 20~30가지를 쓸 때쯤 의식 속 정보가 바닥날 것이다. 그때부터 뇌는 무의식 속 정보를 꺼내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의식 속의 내가 더 이상 써 내려가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의 장치가 더 필요하다. 바로 30분 시간제한. 의식 속 글쓰기는 더욱 압박을 받는다. 덕분에 우리는 무의식 속 정보를 더 빨리 꺼낼 수 있다. 30분의 글쓰기를 끝내고 글을 다시 보자. 아마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의 저자 박미라 씨는 이 같은 글쓰기를 통한 무의식을 마주하는 과정에 대해 더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둘째, 유산소 운동이다. 달리기에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다.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을 일컫는 말이다. 이때의 의식상태는 헤로인이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을 투여했을 때와 비슷하다. 즉 알코올의 힘을 빌려 무의식에 다가간 것처럼 의식의 무중력 상태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맨 정신으로 무의식에 다가갈 수 있다.
꼭 달리기가 아니어도 된다. 주로 달리기를 예로 들지만 가쁜 호흡이 일정 시간 병행되면 모두 러너스하이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수영을 하면서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막 초급반에서 영법을 모두 배우고 중상급반으로 반을 옮겼을 때였다. 중상급 반의 운동량은 초급반보다 현저히 많았기에 난 헉헉대며 앞사람을 따라가기 바빴다. 초급반이 1시간에 10바퀴를 왕복한다면 중상급반은 족히 25바퀴는 돌아야 했다. 그렇게 가쁜 호흡을 하며 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계점이 온다. 힘들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몸이 절로 움직이는 상태. 바로 그 때다. 그 순간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물살을 가르는 팔의 감각이 하나하나 느껴진다. 비로소 생각의 무중력의 상태에 도달한다.
우리가 무의식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의식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과 걱정들을 놓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러너스 하이 상태에서는 다르다.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걱정은 무게에 비례하지 않는다. 걱정하는 시간에 비례한다. 볼펜처럼 가벼운 걱정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똑같이 힘들다. 유산소 운동은 걱정을 잠시 놓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