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이셨던 나의 부모님은 지난 2004년 80세를 일기로 한 해에 돌아가셨다. 나의 엄마는 평생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신 천생 여자였다. 한 때 사업을 하시던 남편 덕에 사모님이라 불리며 집에서 늘 곱게 한복 차림을 하고 계실 만큼 멋을 아는 분이셨다. 그러던 엄마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하시게 된 것이다.
엄마는 중앙여고를 나온 나름 인텔리 여성이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무산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항시 어린 딸들에게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해보라고 말씀하시던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깨어 있는 여성이었다. 평생 언니들 사이에서 편하게 살다 결혼을 앞둔 내게 “너는 네 일을 하라. 집안일은 시키면서 살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내 나이 쉰을 훨씬 넘긴 어느 날, 엄마를 회상하면서 일기장에 엄마가 내게 남겨준 정신적 유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글로 남긴 적이 있었다.
“나의 엄마, 일찍이 집안일은 시키고 살라 하시며 내가 평범한 가정주부로 머물지 않도록 비전을 심어 주시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가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는 말씀으로 내게 자유와 분별력을 키워 주셨던 나의 엄마.”
나는 엄마의 이 같은 교육방침 덕에 중학교 때부터 자유롭게 음악과 영화에 심취하여 공연, 극장가를 누빌 수 있었으며 나만의 꿈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특히 엄마는 당신 자식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엄청나게 크셨다. 자녀인 우리는 엄마의 맹목적인 그 믿음 덕분에 양심상 잘못된 길로 갈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가끔씩 우리 엄마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나도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세 아이들을 가급적 믿음으로 대하고자 무던 애를 쓰곤 했지만 때로는 아이들에 대한 불신으로 잔소리가 턱 밑까지 차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크실 수가 있었을까!
남편으로 인해 사모님에서 시장에서 호떡을 구워 파는 일까지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오신 엄마는 70대 치매를 앓게 되어 자식들을 눈물짓게 만드셨다. 결국 2004년 2월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만 찾으시다가 같은 해 12월 대전의 한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엄마는 정말 마음이 넓고 너그러우신 분이었다. 서울서 아버지와 결혼 후 이북에 있는 시댁에 인사차 들렸을 때 당시 12살이던 시동생이 서울에 데려가 달라고 울며 떼쓰자 서울 단칸방으로 데려와 대학까지 공부시켜 결혼 후 독립케 하셨다. 현재 구순 넘으신 나의 작은 아버지는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시며 엄마가 아니었다면 본인은 북한에 남아 온갖 고난을 다 겪었을 것이라며 눈물짓곤 하신다.
작은아버지의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데 수중에 돈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면 형수였던 엄마가 어려운 형편에서도 어디선가 용돈을 구해 와 손에 쥐어 주시곤 했다 한다.작은아버지는 그런 형수를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어머니처럼 섬기셨다.
나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량기를 타고 나신 분이다. 나의 외모는 엄마를 닮았지만 내면적인 성향은 다분히 예술적 기질을 타고나신 아버지를 빼닮았다고 생각된다. 황해도 연백 출신이신 아버지는 6.25 전쟁 이전에 이북에 홀어머니만 남겨둔 채 월남하여 서울에서 생활하셨다. 그러다 남북이 분단되자 그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 이산가족 방송을 보실 때마다 늘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마음이 여리셔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다. 한 때 풍족했던 우리 집에는 가족 외에도 늘 군식구들이 북적댔는데 거의 외가 쪽 친척, 즉 형편이 어려운 엄마의 사촌동생 등 친척들이 우리 집을 수시로 거쳐가곤 했다. 뿐만 아니라 사업이 잘 될 때는 동생이며 처남 에게까지 집을 사주시는 등 손이 크시기로 유명하였다. 친구들에게 보증을 서 주어 재산을 날리기도 서너 차례, 때로는 가족보다 남을 더 많이 챙기셔서 자식들에게 원망을 듣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옛 한시나 논어, 맹자 등 고전을 입에 달달 외우실 정도로 달변가셨는데 그러한 아버지의 한량 기질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바로 나였다. 나 또한 이십 대부터 청마 유치환 님, 미당 서정주 님의 시에 빠져 시집을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사십 대 무렵, 한 때 시작에 몰입했던 기억이나 무엇인가 끊임없이 기록하는 습관, 한 가지에 빠지면 끝장을 볼 때까지 해 나가는 열정 등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막내라서였는지 나는 유독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언니, 오빠들은 무엇인가 아쉬운 일이 있으면 나를 동원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만화책을 빌려 보고 싶다거나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특히 그러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만화책을 불량서적 정도로 취급했기에 어른들은 대부분 자녀들이 만화 보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는데 막내인 내가 만화를 빌려오는데 대해서는 그나마 관대하셨기에 나는 우리 집의 만화책 빌려 오기 담당이었다.
특히 방학 때는 만화책을 빌려 놓고 엄마가 외출하실 기회만 엿보다 엄마가 나가시면 모두 이부자리를 펴고 엎드려 몰래 숨겨놓았던 만화책을 탐독하며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그러다 문득 인기척이라도 나면 약속이나 한 듯 부리나케 만화책을 옷 장 밑으로 밀어 넣어 감추고는 각자 딴청을 피곤했다. 돌이켜 보면 과연 엄마, 아버지가 우리의 치기를 모르셨겠는가! 다 아시면서도 모른 척해 주셨던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비로소 헤아리게 된다.
또한 한참 유복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버지 뭐 사다 줘~~!!”라는 나의 전화 한 통화면 양손에 전기구이 통닭이며 바나나, 복숭아 등 과일을 한 아름 사 들고 오셨기에 언니, 오빠들은 먹고 싶은 것을 아버지께 말하도록 나를 은근히 부추기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부기 1급 자격증 도전을 위해 학원에서 대여섯 명의 남녀 선후배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놀며 어울렸는데 아무리 함께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언니들이 학교 다닐 때라면 남학생들을 집까지 데려 와 어울리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막내인 내게는 가능했었다.
엄마는 막내의 친구들이 집으로 몰려오면 자장면이라도 시켜 주시며 반기셨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친구들과 밤새도록 함께 게임을 하며 놀 수 있도록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날 모든 친구들을 앉혀 놓고 즉석에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적도 있었다.
이렇듯 엄마도 그러했만 아버지의 나에 대한 믿음은 가히 맹목적이셨다고 생각된다.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한 이후 자신감을 회복한 내가 바로 인근의 중학교에 진학 서류를 혼자 제출하러 갔던 일이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이었음에도 아버지는 “무슨 일이던 스스로 처리하는 막내”라는 말씀으로 나를 무척 칭찬해 주셨는데 그 이후 나 또한 아버지에 의해 나 자신을 그렇다고 믿고 자라게 되었다.
결국 부모님들의 칭찬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보잘것없는 가정형편에 여상을 졸업하고 공직생활 30여 년을 마친 후 돌아 돌아 육십이 넘어 화가로서의 삶에 진입한 나를 돌아보면 부모님이 주신 칭찬의 유산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