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갚은 고양이 (12편)

50년 만에 화가의 꿈을 이룬 나의 미술, 음악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

by 김경미

내 마음속 “추억의 가족”


나의 삶에서 부기 1급을 함께 공부하며 어울렸던 친구들과의 추억을 빼놓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친구들은 각자 학교가 다른 남녀 상업고등학교 선, 후배 학생들이었다. 당시 모 대학에서는 부기 경시대회를 통해 입학에 특전을 주는 곳이 있었다. 가정 형편상 상고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막연한 대학 진학의 꿈과 기대를 안고 부기 1급에 도전했었다.


부기 학원을 다니던 2학년 어느 날, 학원에서 전체 수강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통해 장학금을 주는 1급 반 학생을 선발하였다. 나는 이미 학교에서 요구하는 2급 자격증을 취득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도전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시험에 응시한 결과 2등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가 1급 자격증에 도전한 계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부기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나는 내가 2등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존심 상했고 그것이 나의 오기를 발동케 하였다. 대학 진학의 길도 있다 하니 한번 도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내 인생 가운데 나의 내면에 숨겨진 승부욕과 무엇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볼 때까지 멈추지 않는 성정이 처음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있어 대학이란 사막의 신기루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나를 포함한 6-7명의 학생들이 막연하게 저마다 각자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 하나로 청운의 꿈을 안고 부기 1급 자격증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방과 후에야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니 마치면 한 밤중이었다. 그 시간이면 출출하여 시장 골목 분식집에서 라면이나 만두를 사 먹기도 했고 집이 가까운 남학생들이 바래다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때로는 식당 주인이나 어른들로부터 오해의 눈길을 받기도했다. 그럴 때면 손에 들고 있던 회계학 교재를 보여드리며 오해를 풀어드렸는데 어떤 분들은 오히려 우리들을 칭찬, 격려해 주시기도 했다.


자격증 시험이 있는 전 날이면 모두가 함께 학원에서 밤을 새웠다. 기나 긴 밤, 공부를 하는 틈틈이 학원에 있는 오디오로 음악도 함께 듣고 서로 어려웠던 가정형편을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한 여름에는 공부를 핑계로 책을 들고 청수장 계곡에 올라가 물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형편이 좋거나 나쁘거나를 막론하고 서로의 집을 다니며 부모님들께도 인사를 할 정도로 모두 하나 같이 가깝게 지냈다.


친형제만큼이나 가까워진 우리들은 서로의 나이, 외모, 성향에 따라 엄마, 아버지, 첫째, 둘째… 막내로 서열을 매겨 마치 가족처럼 함께 어울렸다. 조금 늦게 합류한 친구들에게는 삼촌의 지위까지 부여하며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나의 십 대 후반기는 학교보다 오히려 학원에서 더 많은 추억을 쌓아 나갔고 마침내 나는 고3 초반 무렵 1급 자격증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약 열 달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여 부기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해서 외형적으로 내 삶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상업학교에 다니던 일개 여학생이 학교의 진학지도 없이 자격증을 활용하여 대학입시에 도전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한계가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로부터 많은 부분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고 한 분야 최고 자격증을 취득한 성취감을 경험, 자신감이라는 매우 큰 무형의 자산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당시 친구들은 지난 시간에 대해 나와 같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커다란 무형의 자산을 안겨주었던 그 시절의 그들 모두는 아직도 내 마음속의 정겨운 “추억의 가족”들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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