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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미 Sep 26. 2022

나는야 외로운 금붕어 합창단원


어린 시절 나는 서울 모 대학 부속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항상 그림자처럼 조용한 아이였다. 3학년 무렵 아버지 사업 부도로 등록금 독촉을 받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 선생님은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 항상 있어도 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기에 위축감으로 인해 매점조차도 혼자 다니지 못할 만큼 매사에 자신감이 없다.


점심시간이면 늘 혼자서 도시락 뚜껑을 덮은 채 수저 닿을 부분만큼만 살짝 열어 밥을 떠먹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일제 보온 도시락이나 알록달록한 철제 도시락 통에 예쁜 무늬가 있는 도시락과 보온병을 세트로 가지고 다녔다. 나의 도시락은 누런 색의 작은 양은 도시락이었다. 오빠가 저학년 때 쓰던 도시락을 물려받았다.


친구들의 도시락은 화려했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소시지는 물론 장조림, 명란젓에 김을 넣어 만든 계란말이 등. 허구한 날 오이지무침, 콩나물에 어쩌다 주간 행사로 계란 프라이 하나를 얹어 주면 감지덕지한 내 도시락과는 너무나 비교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일찍이 교과 담임제를 채택하여 예, 체능 과목은 화가나 음악가 선생님이 직접 가르치셨는데 훤칠한 키에 안경을 쓰신 멋진 음악 선생님이 합주와 합창 지도를 하셨다. 많은 아이들이 합주 때면 멜로디언, 멜로디카, 실로폰 등을 가지고 왔다. 정 안되면 트라이앵글, 탬버린을 가지고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나와 몇 명만이 항상 캐스터네츠, 즉 가장 저렴한 짝짝이를 준비물로 가져갔다. 우리 형편에 비싼 멜로디언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큰북, 작은북을 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당당하게 악기를 두드리고 불어 대며 연주했지만 나는 가끔씩 등장하는 부분에서 짝짝이를 몇 차례 두드려 주면 끝나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나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4학년 때로 기억되는 어느 날 학교 개교기념행사로 4학년 학생 전체가 참여하는 백설공주 뮤지컬을 공연한다고 했다. 나는 가장 만만한 합창단원으로 참여케 되었다. 주인공은 물론 예쁘고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가 선발되었다. 왜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들은 하나 같이 예쁘기까지 하는 걸까? 예뻐서 주인공이 된 것인지 선망의 주인공이 되었기에 예뻐 보이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의문이다.  


매일 합창 연습이 이어졌지만 친구들 옆에만 서면 쪼그라들었던 나는 위축감 때문인지 노래할 때 도무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암만 소리를 내려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요령 하나를 터득했다. 합창 연습 때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내려고 힘들어할 필요가 없었다. 금붕어처럼 입만 벙끗 벙끗하며 노래를 부르는 척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척” 이 아니었다. 실제로 목소리가 꽉 막혀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나의 연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공연 리허설을 위해 좁은 교단을 무대로 가정하고 촘촘히 서서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에게 그만 입만 벙끗하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그때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그 친구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후 당시 광화문 시민회관 (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공연을 어떻게 마쳤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다. 그렇지만 그날의 당혹감은 참으로 곤혹스러웠고 나를 더욱더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 같은 이유로 나는 내가 노래를 아주 못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시절 내내 라디오 음악에 빠져 매일 심야방송을 들으며 통기타 음악과 팝송을 섭렵했지만 여전히 나는 노래를 못하는 아이였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간혹 강당 무대에 한 명씩 세워 놓고 독창 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여 늘 최하 점수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학교만 가면 위축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에만 오면 달라졌다.

오빠 기타 반주에 맞춰 곧잘 노래를 불렀고, 초등학교 때는 가끔 작은언니와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래고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대곤 했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가 아닌 “뜨거운 안녕” “별이 빛나는 밤에” “봄비” 와 같은 애절하고도 구슬픈, 분위기 있는 성인 가요들을 목청껏 불러 댔다. 학교에서 억눌렸던 욕구를 집에 와서 발산하였던 것이었을까?


그러한 나의 잠재력은 사회생활 시작과 함께 폭발하게 되었다. 노래방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가라오케라는 무대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노래하는 것을 즐겨했다.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술 한잔 못하는 내가 회식 시간이 즐거울 정도였으니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한 위축감에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작은 꼬마 아이가 못내 안쓰럽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내 안의 그 어린 꼬마와 마주하며 토닥토닥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곤 한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기에 그 또한 소중한 추억 하나로 이렇게 회고할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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