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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미 Mar 25. 2023

엄마의 마음, 엄마의 기도 (2)

약 한 달 전 막내 아들을 독립시켰다. 막내는 늘 그래왔듯이 학교 앞에 집을 얻는 일부터 이삿짐 꾸리기와 뒷 정리하는 일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했다. 나는 막내가 반 지하 집을 얻는다 했을 때 “반 지하만은 곤란하지 않겠느냐”라고 조언을 했을 뿐이다. 막내는 말이 반 지하지 창문도 크고 몇 계단만 내려가면 되는 거의 지상집과 다름없는 곳이라고 말하며 그대로 계약을 진행했었다.


이사 당일, 나 또한 미술 작업실을 옮기느라 집 정리를 해야했으므로 “친구들이 도와주기로 했으니 굳이 엄마가 동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막내의 말에 못 이기는 척하며 따라 나서지 않았다. 이사를 마친 후 약 이 주일쯤 지난 후에야 드디어 아들의 집을 방문했다.


이쯤 되면 너무 무심한 엄마가 아닐까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삼십여 년 공직생활을 하며 세 아이를 키웠던 나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 입학 후 서울 외곽에서 자취를 하던 딸이 커다란 트렁크를 가지고 짐을 옮길 때조차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혼자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한 어찌 보면 모진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맙게도 세 아이들은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서운함 없이 스스로 잘 적응하며 성장해 주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새로 꾸민 공간을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막내와 함께 집을 구하러 다녔다면 결코 계약하지 않았을 집을 얻은 것이었다. 문을 열고 두 어 계단을 내려서면 아주 작은 현관이 있고 방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현관보다 방이 더 낮은 구조였다. 무엇보다 그 현관이라는 곳에 배수구조차 없었고 오히려 현관보다 두어 계단 높은 화장실 안에 배수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기묘한 구조였다. 삶의 편의성과 안전문제는 뒤로하고 그저 자취하는 학생들에게 임대료를 얻고자 지하를 개조하여 억지로 짜 맞추어 놓은 것 같았다. 아니 우리 아들 집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일대 일반 주택가 지하 모두가 비슷했다. 여름 장마철 행여 집중 호우라도 내린다면 필히 물난리를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장마철에 소나기라도 내리면 마치 엄마 무덤이 떠내려 갈까 울어대는 청개구리처럼 나 또한 밤잠을 설치며 아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막내는 그렇게 염려하는 내게 도리어 그 동네 원룸 자취방들이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별 문제없을 것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가성비로 따지면 이만한 집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 4학년이기에 불과 8-9개월만 살고 말 집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넉넉한 보증금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럴싸한 자취방을 얻어주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가슴 한 복판으로 밀려왔.



7-8년 전 장남인 큰 아들이 대학 4학년이던 시절에도 그러했다. 스스로 얻었던 자취방을 방문했을 때 겨우 몸 하나 눕힐 만한 공간에 짐을 꾸린 아들을 보고 못내 안타까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나 혼자 여러 가지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면서 아이들 셋의 양육까지 책임져야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위로 두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모두 독립하여 그때보다는 나아졌다지만 그럴싸한 자취방을 얻어줄 목돈은 여전히 부족했다.


막내의 자취방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해맑게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보니 자책감과 더불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념이 밀려왔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늦둥이 세 째를 얻었다. 당시만 해도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아래 아이들이 셋이면 미개인이라고 놀림을 받던 시절이었다. 하다못해 정부의 의료보험 혜택에서도 제외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다행히 막내가 태어난 이듬해 인가 세 째에게도 의료보험 혜택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매일 퇴근 후 연일을 제치고 집으로 달려가 열심히 막내의 육아에 전념했었다. 막내 덕분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욱 오랜 기간 동안 육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막내의 출생은 내가 세상 태어나 가장 잘 한 선택 중의 하나라 생각할 만큼 녀석은 내게 늦도록 행복을 주던 아이였다. 그럼에도 마지막 학창 시절을 보내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자취방 하나를 얻어주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내는 지난 겨울방학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에서 계속 일해 주기를 원하여 생활비를 벌게 되었다며 오히려 내게 20만 원의 용돈을 송금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전 처음으로 막내가 보내주는 용돈을 받으니 미안함, 안쓰러움과 더불어 마음이 울컥했지만 나는 담담히 “장마철에 호우성 소나기가 내리면 가차 없이 휴대폰만 챙긴 채 집으로 달려오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새벽에도 내 마음은 각자 주어진 역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세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최선을 다 해 키웠다지만 늘 바빴고 경제적으로 빠듯했던 엄마에게 왜 부족함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항상 감사하며 잘 자라준 아이들이 너무도 고맙고 대견할 뿐이다.


비록 세 아이들에게 넘치는 풍요로움은 고사하고 차고 넘치는 대학가의 번듯한 원룸 한번 제대로 얻어주지 못했지만 젊은 시절의 그 약간의 경제적 결핍이 오히려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밑거름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밝아오는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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