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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송 Oct 21. 2023

낡고 빛바랜 것이 주는 힘

3대가 모인 외가 단합 모임에 다녀왔다. 7남매인 엄마는 여섯째시고 엄마 위로 삼촌들과 나이 차이가 나는 터라 사촌들 중에서도 나는 어린 축에 속했다. 언니 오빠들이 한참 사춘기를 지낼 때 난 천지분간 못하는 유치원생이었고, 다들 성인이 되었을 땐 초등학생이었으니 같은 공감대나 관심사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잘 놀아주던 사촌 언니가 있었고, 언니가 집에 오면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평일 오후 시간대에 인기 만화가 방영하는데 언니는 연예가 중계를 틀곤 했다. HOT의 팬이었던 언니는 종이에 가사를 인쇄해 우리 삼 남매를 연습시켰다.


"아이야! 니가 속한 세상에 넌 너무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상 속에~" 아직도 입에 익어 자동으로 나오는 아이야 랩. 이글파이브의 오징어 외계인도 외웠다. 종이를 쥐고 언니의 지휘에 맞춰 노래를 연습하던 기억이 나 글을 적으며 웃음이 연신 나온다. 지금 아이야와 오징어 외계인을 반복해 들으며 그때의 감성을 소환해 본다. 크고 나서 문득 생각하니 언니도 놀고 싶었을 나이에 우리랑 시간을 보내준 게 참 고마웠다.


코로나를 보내고 오랜만에 물 좋고 새소리 나는 펜션에 모였다. 조카들 보물 찾기도 하고 피구, 풍선 터뜨리기 같은 야외활동을 하다 보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펜션에 빠질 수 없는 바비큐와 함께 술잔 부딪히는 소리에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달아오른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데워져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에도 꽤 오래 야외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땐 그랬지"


낡은 서랍을 열어 빛바랜 추억의 장면을 나열하는 우리들의 대화가 참 좋았다. 지겹도록 나누어도 좋으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보았으면. 다정은 때론 말보단 눈빛이라 따뜻하게 주고받던 시선들에 괜스레 맘이 든든했다. 낡고 빛바랜 것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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