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마지막 날에는 어묵국을 먹는다.
점점 잠이 일찍 깬다.
늙어서 이기도 하고,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참사 후유증일수도 있고
복합적일게다.(모든 일이 다 그렇다. 단 한 가지 이유만 있는 단순한 것은 없다.)
자꾸 뉴스만 찾아본다. 무의식적으로 누워서도 휴대폰을 자꾸 보게 된다. 좋은 소식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어제는 퇴근 후 아들 녀석과 고기를 구워 먹었다.
아들 녀석 회사는 지난 주 금요일 종무식을 했고 이번 주 이틀은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
2일에 시무식을 한다니 꿀휴가 중인 셈이다.
너무 푹 쉬어서 하루종일 밥도 안먹고 잤다하니
(아침에 차려놓고간 빵만 먹었더라)
퇴근 하자마가 고기 한 팩 구워서 있는 있는 반찬과 저녁을 먹었다.
나는 양배추쌈에
아들 녀석은 구운 김에 싸서 먹었다.
그리고는 보통 나른해지면서 일찍 잠을 드는게 나의 주패턴인데
뉴스를 보다보니 잠이 오질 않는다.
할 수 없다.
내일 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남편과 함께 먹을 반찬을 할 수 밖에...
남편이 암환자가 되다보니 매운 것, 자극적인 것, 딱딱한 것을 피하게 된다.
내가 피하는게 아니라 그런 것을 먹지 못한다.
아귀가 아프고 잘 안벌어진다고 한다.
항암제를 맞으면 그렇다고 한다.
이번 새해는 떡국 조금 끓이고 잡채하는 것으로
나와의 잠정적인 타협을 본다.
누가 그러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 첫날은 떡국을 먹겠지만
올해 마지막날은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가 어묵국을 끓였다.
부드럽고 칼칼하지 않은 순한 맛으로...
어묵과 두부넣고 계란물 마지막에 조금 넣고
파 듬뿍 넣어서 끓였다.
남은 두부는 따로 구워두었다.
양념을 할까하다가 그만두었다.
입맛이 없으면 간장도 쓴 법이다.
퇴근 후 내가 힘들수도 있어서(이 나이의 컨디션은 종잡을수가 없다.)
하던 김에 잡채거리를 미리 볶아두었다.
당근, 양파 채썰어 볶고(채써는 기구는 쓰지 않는다. 그것을 쓰다가 스쳐서 손이 더 베인다.)
달걀 흰자, 노른자 나누어 구운 후 듬성듬성 썰어주고(이쁘고 가늘게 채써는 것은 이제 힘들다. 노안에 손힘이 점점 떨어진다. 그리고 듬성듬성 썬 것을 다음 날 떡국 고명으로도 사용한다. 일타쌍피이다.)
잡채용 고기에 대파 길게 썰어서 간해준 후(후추를 괜히 넣었나 후회중이다. 후추도 매콤할 수 있으니) 볶아두었다.
이제 퇴근 후 당면 불려서(휴가 중인 아들 녀석에게 물에 담가두라 하면 되겠다.)
오늘 준비한 것들 다같이 후루룩 볶아서 먹으면 되겠다.
내 스타일의 간편 잡채이다.
개인적으로 시금치가 들어간 잡채나 김밥을 선호하지 않는다.
시금치는 그냥 시금치 존재만으로 무치거나(고추장에 무친 것이 가끔 입에 댕기더라)
시금치 국으로 끓여서 그만의 풍미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고도 오늘 아침 일찍 눈이 떠져 이 글을 쓰고 있으니 할머니 스타일의 삶이 된 게 틀림없다.
옆 동에 아침부터 무언가에 열심인 분들이 보이고
이 아침에 유난히 정신이 말똥말똥한 고양이 설이도 보인다.
오늘은 나를 깨우느라 얼굴 들이밀고 보채지 않았으니 아마 설이는 피로도가 덜 할 것이다.
지금 식빵 자세로 옆 동 출입문을 주시하고 있다.
마치 자기가 현관문 관리자가 된듯 진심이다.
오늘이 2024년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내일 아침 떡국을 위해 소고기를 볶고 곰탕 국물을 뎁히고 떡국용 떡을 불리면 실감이 날까 모르겠다.
어제 귤, 바나나, 방울토마토, 사과 그리고 단감을 샀는데
단감은 딱딱해서 남편이 먹기 힘들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어쩌냐. 아픈 엄마에게 드렸던 것처럼 얇게 슬라이스해서 주어야겠다.
아참. 잠을 일찍 깬 이유에 하나 더 보태야겠다.
아버지 기일이 1월 5일이다.
어제 막내 동생과 납골당 갈 계획을 세웠더니
그 기억이 남았을 수도 있다.
벌써 3년이 되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셨던 그 때가 말이다.
하필 코로나19로 면회가 불가능하던 그 시기를 홀로 보내시면서(물론 옆에 24시간 상주하는 전문간병인이 있으셨다만) 얼마나 많이 외롭고 힘들고 아프셨을까?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갔으나
장례식장으로 움직이기전에도 마지막으로 코로나19 검사를 받으셨어야 했다.
그때는 그랬었다.
돌아가셨지만 코로나19는 아니라는 확인증이 있어야만 장례식장에 시신을 받아주었다.
그 아버지를 모시고 장례식장에 들어셔면서 나는 울지도 못했다.
미안해서였다.
끝까지 집에서 모시지 못했던 것이 그리 미안했다.
물론 병원이 환경이 더 좋긴하지만 아버지는 가기 싫으셨을게다.
아버지에게 이제 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만한다고 이야기를 했을때
대답은 못하셨으나 흔들리던 아버지의 눈동자를 보았다.
콧줄을 끼고 말은 못하셨으나 정신은 조금은 남아있던 시기셨다.
요양병원에서는 줄기차게 잠만 주무셨다한다.
눈을 떠서 부딪히는 현실이 싫으셨을수 있다.
동물을 그리 좋아하셨던 아버지께
이리 이쁜 우리 설이를 못보여드린것도,
첫 손주인 아들 녀석의 결혼식도 못보여 드린것도 아쉽기만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울지않았던 내가
이 글을 쓰면서는 눈물을 흘린다.
90 수명을 다했고(물론 90이 되고 닷새만에 가셨다만)
10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두 번째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크리스마스의 악몽이었다.)
7년간 투병하시다가 3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도 이리 눈물이 나는데
이번 참사 유가족들은 오죽하랴.
그 마음을 헤아릴수는 정녕 없다.
이래 저래 <Happy New Year>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는 힘든 날이다.
너무 일찍 일어났으니 오늘은 일찍 푹 잘 수 있으려나.
이제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
(너무 일찍 글을 올리면 이 글 알람으로 깨시는 분이 계시려나. 그분들께는 죄송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