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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124

엑셀과 PPT 그리고 구글 클래스룸

by 태생적 오지라퍼

교사여서 받은 특혜가 많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교사여서 받아들여야 할 많은 의무가 있고

그것에 비하면 특혜는 다소 작은 양이긴 하지만 말이다.


구글이나 MS가 서울시교육청과 MOU를 맺어서

그간에 당연하게 무상으로 많은 용량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들을 이제는 사용할 수가 없어진다.

물론 내 계정을 삭제했을 경우이다.

새 업무 담당자가 얼마나 빨리 삭제할지는 알 수 없다.

이전 미래학교에서는 MS를 기반으로 디지털기기를 세팅했고

엑셀이나 PPT 등을 그 계정으로 사용하게 해두었었다.

집에서 사용하는 내 노트북도 그때 세팅한 것이었는데

미래학교 내 계정이 삭제된지 1년쯤 되어간다.(꽤 오랜기간동안 놔두었던셈이다.)

물론 마지막 학교 계정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도 이번 달까지만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엑셀이나 PPT 문서를 열어보거나 작성하려면 내돈내산을 해야한다.

자영업자나 개인사업자의 어려움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마지막 학교에서는 구글을 기반으로 디지털기기를 활용했다.

교사계정으로 구글 클래스룸을 만들어서

학생들의 수업 및 활동 관리를 했었다.

어제 각 학급의 구글 클래스룸에 마지막 공지글을 올렸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멋진 고등학교 생활도 기원합니다. 필요한 자료는 2월말까지 다운받으시면 됩니다.>

2학년에게는 졸업 대신 진급이라 쓰고, 멋진 3학년 생활이라고 적었다.

가급적 감정이 묻어나지 않게 담백하게 공지글을 달았다.

학생들에 따라 다르지만

3학년은 사용했던 태블릿을 반납했으니

핸드폰 혹은 집에 있는 PC에 구글 클래스룸을 깔아둔 학생들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답글을 달아준 2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참 고맙다.)

2학년은 태블릿을 가지고 있으니 아마 알람이 갔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마지막 학생들에게

공식적인 안녕을 고했고 그 화면을 캡쳐해두었다.

얼마지나지 않으면 나의 구글 교사 계정도 삭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과의 많은 수업 활동을 가끔 꺼내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냥 그들의 기억속에 남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조금은 섭섭하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에 비해서 단호함이 100이다.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다음 주부터 대부분의 학교는 새학기 준비 전쟁에 돌입한다.

신학기 집중 준비기간이라는 이름하에

업무분장도 발표하고 담임반 학생 명단도 받아들고(사실 이것이 가장 떨리는 일이다.)

동교과끼리 눈치도 보면서 시간표도 작성하고 평가계획도 수립하고 다양한 연수도 받는다.

얼마전 일어난 (절대 일어나면 안되었을) 그 사건으로 인해서

아마도 받아야 할 연수의 양은 더 늘어나고

선생님들에 대한 외부의 시각은 조금 더 안 좋아질수도 있고

다양한 어려움이 커질 것이라 예상되기도 하지만

후배교사님들이여 힘을 내시라.

이 땅의 교사라는 힘들지만 멋진 직종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바란다.

나는 더 이상 공립학교 교사가 아니다.

(2월 28일까지는 맞지만.)

이렇게 한가한 2월이라니 낯설기만 하다.


어제 오후에는 영재교육과 연관된 설명회에 참석했었다.

잘 알고 있는 동료가 운영하는 기관이다.

내가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영재교육분야가 맞지만

일선 학교에 영재는 그리 많지 않고

나는 중학교에서의 인생의 교양으로서,

삶과 연계된 부분으로서 과학을 가르치는 것에

최선을 다했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어제 그렇게 많은 어린 영재(영재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른다만)와 학부모님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과학을 좋아한다는 그 마음은 기쁘지 한량없지만

너무 어려서부터 과학쪽으로만 영역을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나쁜 의미 말고)

항상 그랬던것처럼 나는 기꺼이 그 부름에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서도 기쁨과 보람을 찾게 된다면 더욱 좋겠다.


그나저나 엑셀과 PPT는 어떻게 할까?

PPT는 미리캔버스 무료 버전을 사용한다 쳐도

엑셀은 대체할 마땅한 것이 없다.

내가 혼자 쓰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공유의 목적으로라면 PDF 형태로 보내달라 해야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게 되지 않겠나?

나의 적응탄력성을 믿어본다.

나의 퇴직을 축하해준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사용한 그 단어.

<제 2의 인생>도 쉽지는 않겠지만 한번 해볼만하지는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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