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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Jul 18. 2024

조용한 시간

시끄러운 저놈이 없어지길...

1.

짙은 색의 상하의를 입은 그 남자가 내방으로 들어왔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피부가 허연 그 남자의 눈 밑에는 주근깨가 도드라져 있다. 그를 따라 들어온 줄무늬 남방의 저 여자는 어제부터 여기에 나타났다. 그전에는 내가 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나는 무슨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잘못을 했기에 여기에 온 것이다. 그건 순전히 내 옆에서 지껄이는 저 뾰족한 귀를 가진 검은 머리의 저놈 때문이다. 처음부터 저놈이 하는 말을 듣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저놈은 나에게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한다. 내가 듣지 않으려고 하면 더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한다. 시끄러운 놈.

한 번은 저 시끄러운 놈을 피해 지하실에 숨었는데,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내 머리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망할 놈. 언제까지 따라다닐 건지.

저 시끄러운 놈이 조용할 때가 있다. 저 시끄러운 놈은 내가 화장실에 가면 따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엔 화장실에 자주 갔었다. 그런데, 누나가 끌고 오다시피 하여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화장실이 없는 이 방에서 나는 저 시끄러운 놈을 피할 수 없다. 자다가도 문득 저 놈이 하는 말이 귀에 들리면 잠을 못 잔다. 저 놈은 잠도 없냐.


짙은 색의 상하의를 입은 그 남자를 따라온 줄무늬 남방의 저 여자가 나에게 약을 준다. 시끄러운 놈이 먹지 말라고 한다. 저놈 말은 듣지 말아야지. 저놈 때문에 내가 누나에게 험한 소리 들으며 여기까지 끌려왔으니 이제부 저놈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그때부터 저놈이 하는 말의 내용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어젯밤에는 잠도 못 자게 귀에다 별소리를 다했다. 시끄러워 자지도 못하고 결국은 저놈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침에 하늘색 양복 쟈켓을 입은 젊은 남자가 와서 어젯밤의 일을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누구와 대화했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고,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젊은 남자는 믿을 수가 없다. 누나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던 날 그 젊은 남자가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인쇄된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저 시끄러운 놈이 ‘너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저기에 적어서 정부에 보고하는 거야.’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저놈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나가 “네가 잘못된 것을 알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해.”라고 했을 때, 저 시끄러운 놈이 “여기서 나가야 돼. 여기는 위험해.”라고 했다. 난 저놈의 말을 믿었기에 저놈이 나가라고 해서 나가려고 하니 누나가 말렸다. 잘못한 것을 알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고, 내가 잘못해서 엄마가 아픈 거라고 했다. 엄마가 아파? 왜?


누나는 엄마가 아픈 것이 나 때문이란다. 내가 저 시끄러운 놈의 말을 듣고 엄마를 아프게 했단다. 그런데 나는 기억이 안 난다. 눈물이 글썽한 누나의 눈을 보면서 엄마가 아픈 것이 사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누나와 저 시끄러운 놈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

그날 이후 저놈이 더 시끄럽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저놈에게 말했다. 너와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너 때문에 엄마가 아픈 거라고, 그래서 누나가 나를 여기 데려왔다고 저놈에게 말했는데, 저놈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란다. 엄마가 아픈 것은 누나 때문이란다. 누나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했다. 누나가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예쁜 눈을 가진 누나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엄마는 아프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뼈와 엉덩이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나는 누나의 말을 믿기로 했다.


누나는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주려고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 누나가 그 아이들을 패주었다. 중학교 때 내가 도둑으로 몰려 학교에서 엄마를 불렀을 때도 유일하게 내편을 들어주던 누나다. 나는 누나가 하는 말을 믿기로 했다. 설사 누나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해도 믿기로 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내편이라고 내가 생각하니까, 그런데 저놈이 누나도 믿을 수가 없단다.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이 그 이유라고 했다. 그러나 누나의 그 글썽이던 예쁜 눈을 생각하면 누나를 믿을 수밖에 없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늘색 양복 쟈켓을 입은 사람이 의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줄무늬 남방을 입원 여자가 간호사란다. 짙은색 상하의를 입은 남자가 줄무늬 남방을 입은 여자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옆방의 단발머리 여자가 점을 봐주겠다고 하더니, 내 손을 잡았다. 저 시끄러운 놈이 '손을 잡히면 죽는 거야. 저 여자가 너를 죽일 거야. 가까이하면 안 돼'라고 한다. 나는 저놈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는데, 순간 두려워졌다. 저 여자가 나를 죽일 거라고? 나는 겁이 났다. 점을 봐주겠다고 하더니 대뜸 "엄마가 너를 버렸구나. 그래서 여기 왔지?"라고 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나는 힘주어 말했다.

'엄마가 너를 버린 거 맞잖아. 아, 누나가 너를 버렸구나.' 시끄러운 놈이 옆에서 중얼거린다.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소리쳤다. 갑자기 짙은색 상하의를 입은 남자가 내 옆에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저 시끄러운 놈이 내 옆에 있는걸 왜 아무도 모를까? 누나는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저놈이 누나를 싫어하는 건가?


3.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천장이 하얗다. 자꾸 들리는 기계의 일정한 리듬이 시끄러운 저놈을 떼어 놓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가 거추장스러워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져 눈을 감았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천장이 하얗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니, 예전에 본 얼굴인가?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이것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 시끄러운 놈은 보이지 않는다. 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놈을 찾으려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놈이 발치에 서있다. 저놈이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구나.

놈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것이 어색하다. 내가 놈에게 말을 걸어보려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놈에게 손짓을 하려 하는데 손이 들어지지 않는다.


모르는 얼굴의 손이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런데 손을 잡는 느낌을 알 수 없다. 손을 잡아보라고 말하는데 손에 힘을 주려고 하나 아무런 느낌도 없다. 시끄러운 놈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누나가 생각났다. 누나를 불러봐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누나가 보였다. 누나의 동그란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누나, 어디 갔었어. 왜, 이제야 온 거야'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누나는 내 말을 알아듣을 수 있다. 누나의 눈동자가 흐려진다. 이런, 왜 우는 거야. '목소리가 왜 나오지 않는 거지? 누나는 알아?' 누나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가슴이 아프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오면 숨쉬기가 안된다. 누나의 손을 잡아보려 하지만 손을 들 수 없다.

시끄러운 놈이 나타났다. 저놈은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나는 걸까? 시끄러운 놈이 내 얼굴옆에서 '너, 이제 나랑 끝이야. 그 여자가 손을 잡아서 죽는 거야. 내가 그랬지? 손을 잡으면 죽는다. 내 말 안 믿더니 이제 너는 죽는 거야.'

시끄러워. 숨이 안 쉬어지고 가슴이 아파. 입 좀 다물고 안 아프게 해줘 봐. 야, 이놈아. 안 아프게 해줘 봐.

아. 몸이 무거워진다. 누군가 침대아래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다. 저 어둠으로 끌려가는 느낌이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누나, 누나, 누나 얼굴이 보고 싶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는 아프지 않은 것이 좋아. 아프고 싶지 않아.

'이제 너는 죽는 거야. 이렇게 죽는 거야.'

시끄러운 놈이 아직도 내 귀에 대고 말하고 있다.

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슴이 아파. 어, 아프지 않아.

기억이 아득해진다. 시끄러운 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저놈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조용히 나 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구나. 시끄러운 놈이 없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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