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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야 Aug 01. 2024

열여덟에 기차를 타기로 했다.

박장군이 되고 싶어요.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그냥 그런 오후였다. 햇빛 아래 신발코만 바라보고 걷는 눈에 선로나무 사이에 깔린 돌멩이의 모습만큼이나 생채기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다닌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곁에서 보호막이 되어 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몇 년 동안 머릿속에만 머물던 희망이라는 단어를 내몬다. 

희망을 생각했다는 자체가 어이없다. 희망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기는 한 개념인가? 희망의 반대말은 무얼까 곰곰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품었던 의문 중 하나이다. 도대체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 희망의 반대말을 절망이라고 한다. 절망이란 희망이 존재할 때만 반대말이 될 수 있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 절망이 존재할까? 희망과 절망은 한쌍을 이루는 말인 것 같은데 세상에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다. 

살아온 동안 절망을 느낀 적이 있던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선생님은 생명이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단다. 태어난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 그러한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절망이란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태어난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을 찾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버린 내 삶에서 희망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태어난 이유를 알아야 희망이라는 것이 생기니까. 그러니 한 번도 절망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절망이 어떤 느낌인지도 모른다. 그냥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냥 태어난 것 같다. 아무리 찾아도 이유를 모르겠다. 아저씨가 보고 싶다. “장군아”라고 불리고 싶다.


                                                                                      ❋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은 산동네의 천막이 추웠다는 것이다. 언 손을 녹이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와야 했던 그 산동네의 천막에서 시작된 기억은 군복 입은 아저씨들과 도착한 보육원이 산동네와 가까웠고 먹을 것이 있었고 이불을 덮고 잤으며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고 우린 선생님이 없을 때 서로 주먹질을 했다. 주먹질의 이유는 모른다. 기억에 없는 아이들과의 주먹질에서 이긴 적이 별로 없는 덩치가 작은 꼬마였던 나는 보육원 선생님의 손을 잡고 도착한 어느 집에서 사람에게 나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여섯 살의 작은 꼬마가 되어 그 집 마당을 쓸고 심부름을 하며 주먹질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일곱 살이 되고 여덟 살이 되어 밭일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되어갈 때쯤 주인아저씨가 죽었다. 아주머니는 살림을 정리하여 타지로 떠나며 나를 집과 함께 넘겼다. 새로운 주인은 농사를 짓지 않고 건물을 짓는다 했다. 혼자가 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주인은 여름날 땡볕에 나를 쫓아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산동네의 기억으로 무작정 찾아 나선 산은 푸르름이 가득했다. 그렇게 뒷산에서 생활하던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 경찰복을 입은 아저씨들에 의해 가게 된 시설은 견뎌야 하는 곳이었다. 밭일을 하던 2년 동안 덩치가 조금 커진 나는 주먹질도 어느 정도 할 줄 알게 되었고, 이겨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열 살이 되고 열하나,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한글을 익히지 못한 나는 어느 날 글자라는 것을 알아야 사람구실을 한다는 것을 들어 알게 되었다. 사람구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먹질만으로는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는 형들의 이야기에 그저 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깨너머로 한글을 익혔다. 공부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도 열둘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고, 열여섯이 되면 시설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형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형들은 열다섯이 되어도 혼자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며 더러는 떠나기도 했다. 열넷이 되던 해, 열여섯이 된 형 하나를 따라 시설을 나왔다. 

나를 유독 다독여 주던 형을 따라 나선 곳은 기차역이 보이는 언덕의 작은 폐허였다. 그곳에는 형처럼 시설을 나온 열여섯, 열일곱의 형이 둘 더 있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며 무엇인가를 궁리했고, 나에게는 역 앞 광장에서 구걸을 하게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무작정 형들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 열다섯이 되었을 때 나를 다독여 주던 형이 경찰에 잡혔고,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던 나에게 형을 잡아가던 경찰이 “너도 조심해.”라던 말이 뇌리에 박혔다. 도대체 무엇을 조심하라는 건지. 

형은 역에서 사람들의 물건을 훔쳤다. 나에게 구걸을 시킨 것도 형들의 계산이었다. 구걸을 할 때 사람들의 시선을 나에게 분산시키고 형들은 지갑과 물건을 훔쳤다. 

경찰은 나를 풀어주었지만 갈 곳이 없던 나는 열다섯에 다시 혼자가 되어 역 앞을 서성거리며 살아남아야 했다.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못한 나에게 절망도 없었다. 아니, 절망이 무엇인지 몰랐다. 단지, 난 살아야 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했고, 졸리면 자야 했고, 추우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역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이다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거리의 아이가 된 나는, 형들이 하던 일과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열여섯이 되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어, 나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난 왜 그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한 걸까? 

그러면서 내 나이에 대한 의문도 들게 되었다. 과연 나는 열여섯이 맞을까? 혹시 열다섯이나 열넷 인 건 아닐까?

몇 살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경찰에 잡혔을 때 경찰은 나에게 성과 이름을 물었다. 나에게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었다. 나이를 준 주인아저씨의 성이 ‘박’이었다는 것을 기억했고, 성을 말하라는 경찰의 압박에 난 주인아저씨의 성을 말했다. 경찰은 생년을 물었지만 생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른다는 말에 몇 살이냐고 해서 열여섯이라고 했더니 연도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에게 생년과 성이 생겼다. 


구치소에서 형들은 어린 나에게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고, 그중 주먹이 굵은 형이 마음에 들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주먹이 굵은 형은 ‘남자는 주먹’이라고 강조하며 싸움의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다. 주먹이 굵은 형과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난 형이 대단한 존재하고 생각했다. 주먹이 굵은 형은 조직이라는 곳에 들어가기로 했다며 나에게 선택을 하라고 했고, 나는 형을 따라 조직에 들어가기로 했다. 조직이라는 곳에서는 나이가 어려 정식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열여덟이 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돌아온 거리는 예전의 거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거리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보였고, 성과 이름이 생긴 나에게 새로운 느낌의 거리가 되었다. 그 무렵 거리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게 해 준다는 야학이라는 곳이 생겼다. 야학에서는 저녁에 먹을 것도 주고, 따뜻한 난로도 있다고 했다. 

혼자인 나는 야학이라는 곳으로 이끌려 갔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방학을 맞아 이곳으로 내려와 야학선생님으로 활동을 한다고 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한글을 제대로 배우게 된 나에게 선생님은 여러 가지 이야길 들려주었다. 


선생님은 사람은 제각기 이유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태어나는 것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지낸 시간이 더 많았던 세월에서 겨우 혼자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 열여섯이 되던 해이다. 

여름이 되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가을이 될 때쯤 경찰에서 성과 생년을 가지게 된 나는 겨울에 만난 선생님의 이야기는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이라는 것이 생긴 나는 성도 없이 이름만으로 불리는 내가 태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이 나를 깊은 생각에 갇히게 했다. 

생각은 이상한 것이라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점점 빠르게 자라는 나무같이 가지가 생기고 잎이 생겨 머리를 휘젓는다. 생각을 자꾸 할수록 점점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더욱 많아지며 웃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바닥을 보며 걷는 습관이 생겼다.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왜 없는 것이 많은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나를 생기게 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왜 그런 건지 생각을 하면 감정이 무거워지고, 자꾸만 서글퍼졌다. 나를 태어나게 한 인간들은 어디에 있는 건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주위의 아이들 중 더러는 가지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나는 왜 없는지. 아버지, 어머니가 없다는 생각을 왜 나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나에게 없는 많은 것들이 생겨난 건지,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한 건지. 

이러고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앞으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은 나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이것이 우울이라는 감정이 맞다면 말이다. 우울은 생각이 많아질수록 더욱 우울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살고 있는 세상이 있다. 나에게는 없는, 허락되지 않은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그런 것이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세상.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또 알지 못한다. 그 세상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존재한다. 나는 얼마나 모르고 살았던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을 알게 된 느낌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

 나이를 준 주인아저씨의 죽음이 생각났다. 주인아저씨에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두 분은 나에게 밭일과 집안일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를 “장군아”라고 불렀다. 내가 가지고 있던 아니 내가 알고 있던 내 이름이 부르기 이상하다며 튼튼한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주인아저씨가 죽고 나서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가끔 “장군아”라고 불러주던 주인아저씨가 생각나면 슬퍼진다. 주인아저씨와 지내던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저씨가 시키는 일을 하고 아저씨와 같이 밭일을 하고 아저씨집의 아랫방에 지내면서 그렇게 지낸 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주인아저씨가 보고 싶다. 


나는 꿈이라는 것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이란 것이 생기기 시작한 열여섯부터 꿈이라는 것을 꾼다. 그 꿈에 나이를 준 주인아저씨가 나타나 나를 부른다. 그러면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고 운다. 어디 갔는지 많이 찾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운다. 그러면 아저씨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장군아”라고 부른다. 그러다 깬다. 꿈에서 깨면 가슴에 돌을 올린 것처럼 답답하고 무겁다. 


열일곱이 된 여름에 야학이 다시 열렸고, 그 선생님이 야학에 다시 왔다고 했다. 난 선생님을 만나려고 야학에 갔다. 그는 반년만에 다른 이미지를 풍기며 야학에 나타났다. 겨울의 선생님은 태어남의 의미에 대해 이야길 했는데 여름의 선생님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야길 했다.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아 살기가 힘들다 했다. 살기가 힘들다고? 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살기가 어떡하면 힘든 것인가? 그냥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산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이건 또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닌가?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구치소에 가도 산다는 것에 대해 한 번의 의문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내게 선생님의 생각이 전념되었다. 


“넌,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지 않았니?”라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내 이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름은 누군가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어떤 지칭을 하던지 나를 부른다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이름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의미가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세상살이, 이름, 성, 생년 그리고 산다는 일. 이것들이 가지는 의미가 한꺼번에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슬프다. 그리고 살아온 날들이 아무것도 아닌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들이 두렵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문득 머릿속을 파고들면 두려움이 함께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듯이 무겁다. 


                                                                                      ❋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다시 왔다. 야학 선생님은 더 이상 야학에 나오지 않았다.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나도 더 이상 야학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이 점점 많아졌다. 조직에 들어갈 나이가 되기 전에 여기를 떠나면 될까라는 생각에 역 주위를 서성이며 며칠을 보내곤 했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굶는 날이 많아졌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구걸을 하기도,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역을 서성이며 마냥 멍청하게 있다가 버려진 폐가로 들어가 밤을 보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면서 “비참”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이름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나는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까? 내게 이름을 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왜 그것이 내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까? 내가 부끄럽다. 세상을 살아야 하는 어떠한 의미도, 태어난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 지 이제 2년째 되었다. 그리고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아니, 아무런 변화도 없다. 나는 거리를 서성이고, 작은 버려진 집에서 잠을 자고, 구걸을 하고 지갑을 훔치고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선생님의 말처럼 산다는 것에 포함된 의미를 알아내야 하는 걸까?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비참”이라는 의미를 내 인생에 녹여내면서 미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

다시 주인아저씨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한 달 전부터였다. 아저씨는 여전히 “장군아”라고 불렀다. 내가 울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었더니 사는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살아가는 일이 가지는 의미가 없다거나 너무 힘들다면 살아가는 일을 그만해도 좋다고 했다. 내 어깨를 두드리는 아저씨의 손에는 땀이 났다. 축축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며 “사는 게 힘들면 아저씨에게로 와.”라고 했다. 

나는 왜 아저씨가 부른 “장군아”를 내 이름으로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꿈에서 깬 나는 곰곰 생각했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저씨가 오라고 한 곳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유일하게 내가 의지했던 사람.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부르는 말 대신 자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 사람. 그 부르는 말에 의미가 있다고 해준 사람. 왜 나는 내 이름이 부끄러운지 이제는 안다. 전에는 몰랐으나 글을 배우면서 알게 된 나를 부르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그리고  “장군”이라고 나를 부르며 튼튼하고 힘쎈 사람이 되라고 했던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정다웠다는 생각을 한다. 왜 이제야 아저씨가 생각나는 건지. 왜 열여섯이 되어 내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된 건지. 왜 열여섯이 되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가슴에 돌을 얹게 된 것이지. 이 모든 것들이 아저씨에게로 가야 하는 길인 것 같아 가슴뿐 아니라 어깨에도 돌을 얹은 것 같다. 나는 어떡해야 하나.


                                                                                      ❋

역에는 기차가 머물렀다 간다.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육교에서 내려다 보이던 철길은 눈에 익혀 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대합실 너머는 낯선 곳이다. 기차표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의 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숲을 지나 나타나는 철길을 따라가다 열차 타는 공간이 나타나면 숨었다가 기차가 떠나기 전에 얼른 올라타는 것만이 기차를 탈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시도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도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서서히 찾아오는 바람에 약간의 포근함이 묻어있다. 숲이 거의 끝나는 부분에서 철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덕 아래에 위치한 철길로 내려가는 발길에 흙먼지가 인다. 이제 땅도 봄기운을 느끼며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철길 위를 천천히 걸으며 방향을 가름했다. 낮은 건물들이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니 그쪽으로 걸어가면 표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천천히 기차가 올 시간을 생각해 보자.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은 아침 10시 경과 오후 1시경 그리고 저녁해가 질 때쯤일 것이다. 아니, 요즘 기차 시간이 바뀌었다고 아이들이 그랬으니 그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차를 타기 위해 하루쯤 기다려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기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기차를 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고, 그 생각에 그냥 기차를 타려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철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차를 타려고. 


아저씨 생각을 했다. “장군아”라고 부르며 어깨에 축축한 손을 올리던 지난 꿈을 생각했다. “사는 게 힘들면 아저씨에게로 와.”라고 말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꿈이 아닌 듯하다. 아저씨. 사는 게 힘든지 어떻게 아나요? 한 번도 사는 게 힘들거나 힘들지 않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사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게 된 걸까요? 사람이 태어난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왜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요? 왜 나는 그런 생각 없이 살았을까요? 

왜 나는 열여섯이 되어야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 걸까요? 왜 나는 열여섯이 되어서 한글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을까요? 아저씨는 왜 나에게 나이를 여섯이라고 했나요? 덩치가 작았던 내가 여섯 살로 보였나요? 왜 나는 보호막 하나 없이 이렇게 살아왔을까요? 그나마 유일하게 보호막이 되었던 아저씨는 왜 죽었나요? 세상이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도대체 무엇이었나요? 아저씨는 왜 내 꿈에 자꾸 나타나나요? 


철길옆으로 걷던 발걸음을 철길 위로 옮겼다. 선로 사이에 놓인 돌멩이 밟히는 소리가 찰랑이며 맑게 귀를 울린다. 돌이 이렇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맑게 울리는 소리가 좋아 돌을 하나 주워 들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돌멩이의 표면이 닳아 모난 곳이 없지만 울퉁불퉁한 모양이 맘에 들었다. 하나의 돌멩이는 소리가 없다. 돌멩이를 손에서 놓았다. 돌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가 맑다. 허리를 굽혀 돌을 주웠다 놓기를 반복한다. 소리가 좋다. 한꺼번에 여러 개를 주워 하나씩 떨어뜨려본다. 딱 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돌들이 노래를 하는 것 같다. 

아저씨 이 소리가 참 좋네요. “그래,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좋구나.” 아저씨가 말한다. 축축한 손을 어깨에 올리며 아저씨가 “장군아”라고 부르는 것 같아 눈을 감는다. 아저씨 보고 싶어요. 손에서 돌이 떨어지면서 선로의 돌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아저씨를 생각한다. 

“사는 게 힘들면 아저씨에게로 와.” 아저씨가 말한다. 아저씨 나는 세상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힘드네요. 앞으로도 힘들 것 같아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고, 이제는 세상이 힘들어요. 아저씨가 보고 싶어요. 뒤에서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아득하다. 

아저씨, 기차를 타야겠어요. 그리고 아저씨에게로 갈게요. 기억하세요. 제 이름은 장군이가 아니에요. 아저씨, 이제 저는 아저씨의 성을 따서 박 씨예요. '박이새끼'예요. 아저씨 제가 이름을 이야기했을 때 아저씨의 얼굴이 생각나요. 그리고 아저씨가 한 말도 생각나요. “어느 새끼가 이름을 그따위로 지어.” 아저씨. 그 새끼가 나를 낳아준 새끼래요. 산동네의 천막에서 마른가지로 피운 불 앞에서 죽어간 그 새끼가 나를 “야, 이새끼야.”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나는 이름이 이새끼라고 생각했어요. 경찰서에서부터 나는 박이새끼가 되었어요. 아저씨의 성을 땄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저씨에게로 가서 “장군아”라고 불리고 싶어요. 박장군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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