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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Mar 02. 2023

구체적 소원

 아침부터 소란이다. 하늘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뿌릴 태세라, 오늘만은 안온한 날이 될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다른 전개다. 아내는 장모님을 모시고 어디든 나가자고 한다. 토요일이라 오전에 움직이면 한적할 거라 말하며, ‘어디든 가기 싫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설득한다. 나는 마지못해 길을 나섰다. 여러 곳을 상의한 끝에 장모님이 좋아하시는 근처의 절로 향했다. 차 안의 장모님은 기분이 좋으신 지 연신 미소를 띠며 소녀처럼 아내와 뒷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보조를 맞추며 간간이 대답을 이어 나갔다. 


 토요일이라 많은 신도들이 올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절 내는 한가했다. 산사 안 카페에서 나무를 태워 따뜻한 물을 끓이는 냄새를 맡으니 커피 한잔이 간절했다. 그 절실함을 밀어낸 건 마치 아들과 어머니처럼 자리 잡은 대웅전과 삼성각의 묘한 구도였다. 절에 올 때마다 불교의 종교 포용성을 보는 것 같아 나는 대웅전보다 삼성각에 더 마음이 간다. 삼성, 칠성, 그리고 독성을 모신 곳이고, 그 건물의 배치도 보통은 대웅전의 뒤편에 있어, 마치 삼성각의 토속 신들이 부처님을 보호하고 있는 듯 포근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 불교 사찰에는 종교 배척보다는 토속신앙까지 아우르는 기품이 있다. 이런 추세라면 수백 년 후, 전 인구의 삼십 프로가 믿는 기독교의 예수님도 그곳에 모셔질지도 모른다는 한낱 염치없는 공상도 해본다.


 삼성각 앞에서 이런저런 상념에서 빠져나오니 비로소 내 눈길은 크기가 다른 돌로 쌓은 석탑에 이르렀다. 그 탑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을 금빛 나뭇잎 종이에 적어 매달았다. 나는 문득 궁금했다. 과연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일까 하고. 그리곤 숨어서 남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듯 소원지에 적힌 글들을 유심히 읽었다. 그러나 금세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곳에는 천편일률적인 소원들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무병장수하게 해 주세요” “가정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등등. 나는 일련의 소원들을 보면서 너무 추상적이라 신이 이 메시지들을 보더라도 과연 어떻게 들어줄지 궁금했다. 소원을 빌면서 한 번도 그것을 들어주는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속으로 지청구를 퍼부었다. 나라면 좀 더 구체적으로 “10억을 10년 안에 벌게 해 주세요” 라든지, “요즘 고혈압인데, 약 안 먹어도 낫게 해 주세요” 라든지, “새로 산 00시 00 아파트에 지하철이 들어와 역세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야 들어주는 신도 인간의 간절함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신이니까, 우리의 속마음도 잘 알 거라고 혹자는 말하겠지만, 갈대와 같은 인간의 변화무쌍한 마음을 신이 과연 지레짐작으로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명색이 신인데, 못 맞추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매번 모른 척하는 것 일 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소원 중에 나를 사로잡는 소원이 있었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그야말로 소원 다운 소원이었다. 일단 두 남녀의 이름부터 가 실명이다. 거기에 생년월일이 적혀 있다. 그리곤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사랑하게 해 주세요”. 난 그만 웃음 참지 못하고 말았다. 그 둘의 나이가 오십이 넘었기 때문이다. 누구 봐도 불륜이다. 도덕적으로 야 지탄받아 마땅하겠지만, 그들의 소원이 너무 절실해 보여 마치 조선시대 선비 유부남인 유희경과 기생 매창의 사랑처럼 그 한마디가 아름답게 보였다. 한낱 인간의 마음도 이렇게 움직였다면, 그들이 윤리적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신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불교가 가지고 있는 포용도 사랑이고, 불륜 남녀가 저지른 사랑도 포용이다. 포용과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그럼에도 그 한계를 규정하는 건 신도 아니고, 종교도 아닌 그저 인간 자신들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우기는 가련한 인간들의 아집이다. 종이에 희망을 적으며, 그저 신은 내 맘을 알 거라는 환상에 빠져 인간들은 거만하고 애매한 소원을 적는다. 그리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탓을 하기보다 신을 탓하기 바쁘다. 신을 간절히 믿는다고 말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의 이중성에 신이 말하는 포용과 사랑이 인간에겐 절실히 필요하다.


 장모님과 아내는 나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 멀찌막이 다른 불상들과 전각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며 친구처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나이차이를 극복하는 포용과 모녀간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 둘에게도 분명히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 소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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