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교수의 인터랙션 Oct 17. 2022

번아웃 직장인이 미국 대학 스피치 교수가 되기까지(1)

점들이 선이 되는 과정 (connecting the dots)

2008년 국내 서울 소재의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 석사를 마치고 미국계 컨설팅 회사에 취업한 27살의 나는,

부푼 꿈을 가지고 데이터 분석, 마케팅 인사이트 도출, 클라이언트 발표를 주된 업무로 하는 마케팅 전략 컨설턴트가 되었다.

하지만, 입사하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곧 깨달았다. 업무량에 비해 전반적인 서포트가 너무나 부족했기에 개개인의 초과 업무가 필수라는 것을 말이다.

업무시간에는 클라이언트 요청사항을 처리하고, 정작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야근을 해야지만 끝낼 수 있었다.


당시 팀장이었던 차장님은 윗분들의 지시나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무조건 Yes라고 하고, 나를 포함한 막내 팀원들에게 그 업무를 고스란히 토스했다.

새벽 2-3시 퇴근은 그곳에서 ‘일상’이었고, 당연히 야근수당은 없었다.


어느 날 새벽 2시에 먼저 퇴근하겠다고 같은 팀 대리에게 인사하러 갔는데, 그 대리는 나를 조용한 오피스로 따로 부르더니, 진지하게

“너 이렇게 하다가는 admin(회사 내 지원부서 행정직원) 보다도 못하다는 소리 듣는다.”라고 핀잔을 주었다.


첫 직장이고, 늦은 나이에 들어간 회사라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내 급여 가운데 절반 정도를 집에 보태는 상황이었기에,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어도 나만 생각하면서 결정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지고, 만성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로 인한 아토피염 등 하루하루가 끝이 없는 터널 속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새벽, 그날도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하고, 업무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규정속도를 무시하고 달리는 총알택시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렇게 빨리 달리다가 사고가 나서 어떻게 되어도.. 억울하지는 않겠다.”


‘번아웃’이었다. (2009년 당시에만 해도 이런 단어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심각한 무기력증에 희망도 없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번아웃을 경험하면서, 나는 조금씩 회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공간이었다고나 할까. 나의 사수를, 관리자를, 임원진을 보았을 때, 롤모델로 삼고 싶은 분들이 없었다.

내년에도, 5년 후, 10년 후에 내가 저런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니, 더 이상 다니는 것에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사표를 가슴에 품고, 소위 조용한 퇴사를 실행했다 (하지만, 야근은 꾸준히 했다.)




수개월 후, 결국 퇴사를 하고 당시 남자 친구 (현재의 남편)과 함께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같이 학원을 다니면서, GRE, TOEFL 준비를 했다.

그렇게 반년 넘게 준비를 하고, 2010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으로 약 15군데 지원을 하고 결과를 기다렸는데

2011년 4월 중순이 될 때까지 둘 다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았다.


“우리 인생에 유학은 없나 보다. 이제 미련을 버리고, 내일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일반 회사에 지원을 하자.”라고

남자 친구와 다짐을 하고 헤어진 그날 새벽, 미국에서 이메일이 왔다.


“Admitted to MA Program”


그렇게 기다리던 합격 소식이었다.

하지만, 박사과정이 아닌 석사과정으로 조건부 입학허가가 온 것이다.

이유인 즉, 영어권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적이 없기에 1년간 학업(+영어 스피킹) 등을 지켜보고 박사과정으로 전환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였지만, 펀딩이 없는 석사로 입학하는 것은,

학비와 생활비가 고스란히 자기 부담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 나이로 서른한 살이었던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서른이 넘은 딸이 공부를 하러 미국에 나가겠다고 하는 것을 사실 탐탁지 않아하셨던 부모님이.

그냥 공무원 취업하고 시집가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으시기에,


“나 마지막으로 이거 도전 안 하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 그동안 제가 월급 드렸던 거 다시 주신다고 생각하시고, 학비랑 생활비 1년만 만들어주세요.”라고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 부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용기 있는 발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부모님을 설득하고 그 당시 남자 친구와 결혼식만 올리고,

우리는 그렇게 2011년 8월, 미국 플로리다로 본격적인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스피치를 가르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8화 세상은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