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침을 조금 서둘렀다. 방문할 곳이 집에서 조금 먼 곳인지라 자칫하면 계획한 곳을 모두 들르기에 시간이 촉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비게이션으로는 세 시간이 넘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서해안고속도로에 올랐다.
아리랑 문학관은 조정래 작가가 쓴 연재 대하소설 아리랑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다. 조정래 문학관은 아리랑 문학관 말고도 전남 보성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따로 있는데, 그곳에도 언젠가 찾아볼 생각이다. 아리랑 문학관은 1, 2층에 총 네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1층에 있는 1 전시실에는 아리랑의 줄거리가 그림,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2층의 2 전시실에는 아리랑을 쓰기 위한 취재 활동 전반에 걸쳐 수집하고 작성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3 전시실에는 작가 조정래 개인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4 전시실에는 여러 사람의 필사 원고가 보관되어 있다.
아리랑은 한국일보에 연재된 대하소설로, 배경 시기별로는 1904년부터 1931년까지를 4개의 시기로 나누어 쓰였다. 태백산맥과 함께 작가의 40대를 넘어 50대 초반까지 십오 년이 넘는 세월이었으며, 그사이 어린 청년이었던 아들이 결혼하고 손자도 생겼다. 3 전시실에 걸린 손자와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고 인간적인 느낌을 주었다. 조손祖孫 옆에는 원고가 작가의 키만큼 쌓여 있었다.
작가가 아리랑을 집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 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 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감히 민족통일의 역사 위에서 식민지시대의 민족수난과 투쟁을 직시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런 작가의 신념은 아리랑을 쓰기 위해 취재에 열중하던 시기에 만난 외국의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이제 용서할 만하지 않느냐? 유태인은 용서를 했는데 한국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것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고, 그들은 작가의 대답에 동의했다는 내용이 전시실에 게시되어 있었다.
“독일은 수상 빌리 브란트가 전세계를 향해서 사죄했고, 유태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그 사죄를 받아들여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에 도달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독일과 정반대로 교과서를 왜곡하고,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망언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일식의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 동의에 충실하고자 나는 아리랑을 쓰는 것이다.”
작가는 중국, 러시아, 하와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돌면서 취재한 역사적 사실들과 인물들을 소설 속의 사실과 인물에 녹여 넣었는데, 그 과정과 직접 작성한 많은 취재 수첩, 그림 등의 자료는 2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의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여 완성하기까지 작가가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3 전시실에는 작가의 개인 자료와 작품 연보가 걸려 있었다. 대문의 사진은 3 전시실에 걸린 작가의 모습이다.
이 글에서 방대한 전시실의 자료를 세세하게 설명하거나 작가의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단지 조정래라는 작가가 왜 아리랑이라는 연재 대하소설을 집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작가가 고심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조정래라는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는 기회였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전시실 밖 넓은 광장에는 가수 현숙의 효열비와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그 한쪽에는 작은 가마와 창작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학관을 나와서 길 건너 벽골제 안의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군산의 채만식 문학관으로 출발했다.
원래 글의 서두에 소개했던 오느른책밭 이야기는 따로 떼어내서 '일상이나 그저 그런 이야기' 메거진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