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
장편소설 소금의 작가 박범신 작가의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 나오는 말이다. 박범신 작가는 1973년 중앙일보에 <여름의 잔해>로 등단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는데, 소금 문학관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학관이다. 1층에는 작은 전시 공간이 있고, 계단을 몇 개 올라가서 있는 2층에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독서 공간이 있는 점이 특이했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계단식 좌석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빠를 것이다. 그 위로 올라가면 박범신 작가의 일생과 시기별 작품 발표 현황이 벽면을 두르고 있다. 창밖으로는 멀리 금강 변에서 손을 흔드는 새하얀 갈대밭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다.
작가의 일생은 문제작가 시기와 인기작가 시기를 거쳐 3년간의 절필기 이후 갈망기에 이르러 완성된다. 문제작가 시기는 절망과 분노의 성장기였다. 작가는 그 시기를 “고백하거니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계가 광기(狂氣)로 가득차 있다고 여겼으며... 어떻게든 내가 그 세계로 편입될 수 없으며, 그 세계로 길을 낼 수 없다는 절망과 분노에 가득차서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라고 말했다. 번번히 낙선의 쓴 잔을 마시던 신춘문예에 꾸준히 응모한 이유도 작가가 되겠다는 의지보다는 상금이나 타서 연탄 때는 방이나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요행수에 기대를 걸었다고 회고했다. 1973년에 작가로 데뷔한 이후 처음 5년여는 1년에 단편 한두 편을 발표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쓴 소설들이 주로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갈등 계급을 다룬 소설로서 후에 생각하면 광기의 세계에 대한 반항심을 앞세운 ‘운동 문학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인기작가의 시대는 1979년 여성지 엘레강스에 연재했던 <죽음보다 깊은 잠>이 인기를 끌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당시 단행본 30만 부를 넘기며 그의 첫 베스트셀러 작품이 되었다. 이후 여러 일간지에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등을 연재하면서 1980년대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는 인기작가가 되었다.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는 소설이 대부분이었던 박범신 작가의 많은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점점 대중과 가까워지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에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아침에 날린 풍선>, 중편 <시진읍>, 단편 <역신의 축제> <말뚝과 굴렁쇠> <정직한 변신>,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을 집필하였다.
박범신은 1993년부터 3년간 전혀 글을 쓰지 않았다. 이른바 ‘절필의 시기’로 연재하던 소설도 중단하고 유명 작가로서의 모든 세속적 기득권을 하루아침에 팽개쳤다. ‘문학이 무엇이고 어느 제단에 바쳐져야 하는가’ 하는 고통스러운 질문과 맞닥뜨리기 위해선 기득권을 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외딴곳에 유폐시켰다.
박범신은 1997년 3년간의 침묵을 토대로 한 자전적 연작소설집 <흰소가 끄는 수레>를 출간하고. 1999년 계간지 <시와 함께> 봄호에 <놀>외 19편의 시를 게재하면서 시인 겸업을 선언하면서 연달아 시를 발표한다. 이후 늙을수록 깊어 가는 갈망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박범신의 갈망 3부작으로 잘 알려진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집필한다. 박범신의 시는 마침 내가 방문한 날 1층의 전시공간에서 화가 ‘이후란’님의 그림에 얹혀 시화전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소설가의 시를 감상하게 되었다. 아래에 몇 편 소개한다.
노래 / 박범신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기 저 물로 살아야지
강물 되어야지
고요히 낮아지고 가없이 넓어져
저물녁 그대 꽃잎으로 떨어지면
흔연히 품고 흘러야지
먼바다 끝으로 가서
외로우면 새봄에 봄비로 내려
그대 순한 이마 가만가만 적셔야지
봄풀의 뿌리로 가서
더러 봄꽃으로 피어나기도 해야지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자작나무는 왜 저리 흰가 / 박범신
먼 바람이 와서
오래 씻겨 그러신가
먼 눈물이 와서
따뜻이 씻겨 그러신가
아니야 허공이 내려와
그대 몸에 깃든 게지
허공의 뿌리
허공의 사랑이 내려와
그대 뼈에 깃든 게지
내가 평생 되고 싶은
삶 / 박범신
빈 의자 하나 남기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