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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Sep 27. 2024

잠들지 않는 땅, 아이슬란드

어린 왕자를 생각하며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서진이네 2>가 화제다. 연예인들이 아이슬란드에 가서 사장, 이사, 셰프, 인턴 역할을 맡아 한식당을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메뉴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 내기, 장보기와 조리 예습 등 신선하게 연출되는 점이 흥미로웠다. 물론 손님 접대를 위해 음식을 조리하고 서빙하는 장면과 직원들의 독특한 개성과 소통 방식을 보는 재미도 유쾌했다. 무엇보다 가끔 보여주는 아이슬란드의 풍광을 보면서 나만의 아이슬란드 추억을 꺼내 보며 위안받기도 한다. 내가 마치 지금 그곳에 다시 가 있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몇 년 전 일이다. 오로라 헌팅을 포함한 패키지 상품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혼자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이슬란드를 꼭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불과 얼음의 나라여서일까, 아이슬란드 하면 왠지 파란색의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아이슬란드에 대한 이것저것을 챙겨보며 준비했다. 그래도 가장 무게를 둔 것은 라틴어의 ‘새벽’이라는 의미가 있는 신의 영혼 오로라(aurora)를 보겠다는 희망이 가장 컸다. 멋진 오로라 사진도 찍어와야겠다 마음먹었다. 사진에 집중하다 보면 순간의 감동이나 느낌이 소홀해지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보기만 한다면 아쉬울 것 같았다. 오랫동안 손 놓고 있던 카메라를 정비하고 삼각 받침대와 릴리스 셔터까지 마련했다.      

 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행들은 저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기대를 내놓았다. 블루 라군 온천에서 우유 일광욕을 즐기겠다는 사람,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대륙판이 만난 지점에 우뚝 서보겠다는 커플, 아이슬란드 푸른색 빙하 위를 두 발로 밟아보겠다는 팀. 여행길에 오른 스물다섯 명은 하루가 다 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두 눈을 반짝거리며 들떠 있었다. 드디어 각자의 희망을 실은 밤 비행기가 날개를 폈다. 모든 허물을 감춘 탓인지 밤에 떠나는 비행기는 부끄러움이 없어 보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공항에 내린 우리는 각자의 여행 가방을 끌고 버스에 올랐다. 사방은 암흑, 버스 기사는 현재 용암 분지 사이를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도착한 블루 라군. 한 시간쯤 지나서야 구름이 걷히고 아침 해가 나왔다. 그때야 뽀얀 우윳빛 온천물이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떠나온 곳의 추위와 피곤은 사라지고 온기가 느껴졌다. 여기가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란다.      

 호텔에 들어가서야 룸메이트와 인사를 했다. 유리라고 했다. 참 예쁜 이름이라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끝내고 준비해 온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가방에서 작은 위스키병을 꺼낸 그녀, 여행에서 맞닥뜨린 이런 낯섦을 나는 좋아한다. 술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는 금세 그녀와 뭔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사 후 오로라 헌팅을 위해 로비에 모였으나 밖에는 아직 빗방울이 들치고 있었다. 바에서 기다리는 동안, 유리 언니와 나 그리고 얼마 전 아내와 사별했다는 K 씨와 함께 위스키와 와인과 맥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틔워 나갔다. 서로 다른 이력과 배경을 가졌음에도, 여행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함께 나누었던 웃음과 위로의 말은 또 하나의 추억으로 사라지겠지만 살아가는 일상에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슬란드에 머무는 동안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낮 동안은 주로 관광지를 탐색했다. 싱벨리어 국립공원, 굴포스 폭포, 지상 최대의 게이시르 간헐천을 돌아보는 골든 서클 투어와 지상 유일의 블랙 비치 주상절리를 다녀왔다. 레이니스피아라 주상절리에서는 파도에 마음을 빼앗기다 그만 핸드폰을 놓치기도 했다. 분명 파도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마음만큼 빨리 움직여주지 않았다. 많은 것을 얻고 또 많은 것을 잃은 날이었다.      

 저녁에는 밤마다 오로라 헌팅을 시도했지만 결국 오로라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밤하늘의 별만 잠시 보았을 뿐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련해지는 단어 오로라, 평생 한 번 볼 수 있다면 행운이라 했다. 마지막 날 밤, 우리에게 오로라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마치 자기의 실책이라도 된 듯 가이드는 한 번 더 나가보자고 했다. 구름 지도를 살펴 가며 등대가 있는 북쪽으로 갔다가 또 남쪽으로 갔다가 다시 내륙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어둠이 깔린 광활한 대지, 멀리 불빛이라도 보일 것 같으면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멈추기도 했다. 2시간 동안 달리다 결국은 뚝뚝 떨어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핫스프링 옆에서 핫초코를 마시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오로라 한 자락이라도 보게 해 주려고 빗방울 스치는 밤길을 안내해 준 멋진 가이드 할로(Halo). 일에 대한 열정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자부심과 성실성을 엿볼 수 있었다. 서툰 것 같지만 감칠맛 나는 그의 영국식 발음에서 잊고 있던 먼 기억 속 시간을 꺼내 보며 회상에 젖기도 했다.      


 오로라는 보지 못했지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문득 어린 왕자를 생각했다. 허영심이 많고 지나친 자존심을 가진 어린 왕자. 비록 장미 한 송이와 화산 세 개가 전부였으나 자신의 별을 사랑했던 어린 왕자. 장미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그가 그 꽃에 바친 시간 때문. 만약 어떤 사람이 수백만 개의 별에서 자라고 있는 단 한 송이 꽃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된단다. 밤마다 2~3시간씩 밤하늘만 쳐다보다가 겨우 기억해 낸 어린 왕자의 말이다. 그리고 영화처럼 사라진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화산들이 여기저기 남아있고 싱싱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던 아이슬란드가 어쩌면 어린 왕자가 떠나온 행성이 아니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떠나는 날, 우리 일행은 아이슬란드 해산물 식당에서 성대한 점심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자축했다. 오로라를 잡겠다고 무거운 촬영 도구만 챙겨 온 나, 아내를 갑자기 잃은 후 무조건 집을 떠나고 싶었다는 K, 노벨상을 받은 아이슬란드의 작가 할도르 락스네스(Hall dor Laxness)의 ‘독립적인 민중(independent people)’을 읽고 아이슬란드를 와보고 싶었다는 룸메이트 유리 언니.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각자 살아온 세상을 잠시 나누었던 짧은 만남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신의 영혼에 닿기에는 너무 현실적이라 오로라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한번 아이슬란드에 오겠다는 다짐을 희망으로 남겨두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무지개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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