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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Nov 21. 2022

편지를 쓰다

# 가을 펜팔 #북클럽 문학동네

 

 얼마 전 북클럽에서 '가을 펜팔: 동네 산책'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펜팔 친구를 위한 추천 도서 리스트를 작성하고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 내가 좋아하는 책 그리고 가을이면 생각나는 것 등을 엽서에 적어 보내면 북클럽에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다른 회원에게 편지를 보내준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참여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그러나 분명 책 읽기를 좋아하는 누군가로부터 손 편지를 받는 일은 자못 신선한 느낌이었다. 지난해 가을 펜팔 친구는 부산에 사는 젊은 직장인이었다. 그 인연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젊은 사람들의 최근 독서 취향과 생각을 알아가는 것도 작은 기쁨이었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친구들은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냈다고 수다를 떨지만 나는 막상 시간의 흐름에 대한 느낌마저 없으니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일 년간 함께 한 지인들에게 고마움의 말은 전해야 할 것 같아 연말연시 축하 카드를 고른다. 손 편지를 쓰는 일이 이제는 먼 날의 추억거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들에게 어울리는 카드를 고르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소녀처럼 뒤설렌다. 

 먼 길 돌아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번개 모임을 열어 열렬히 환호해 준 친구에게는 여러 가지 열매가 한아름 담겨있는 눈부신 황금빛 카드를 골랐다. 황반변성으로 한쪽 눈은 거의 실명이 되어 가고 다른 쪽 눈마저 치료하고 있다는 여고 시절의 짝꿍. 내 팔을 꼭 붙들고 세종로 뒷골목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조심조심 걸었던 친구다. ‘언젠가는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타고 난 긍정적 성격과 웃음으로 순응한다.’라는 그녀를 떠올리면 소금밭에 발이 시리듯 가슴이 아려온다.

 ‘제비꽃’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선배를 위해서는, 쓰러지려는 바위를 두 손으로 힘겹게 받치고 있는 예쁜 소녀 그림을 집어 들었다. 뒤늦게 시작한 학문의 길에서 좌절할 때마다 힘을 실어 주고 고독한 길을 함께 걸어주었던 선배.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자기 일을 찾았다고 기뻐했지만, 현실은 늘 자신을 지치게 만든다던 선배의 말이 늘 가시처럼 박혀있다. 늦었지만 이제는 내가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타국에서 나의 문학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선생님께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성탄 카드를 골랐다. 아직은 뉴욕이 그립지 않을 만큼 서울이 좋다고, 무엇보다 푸르고 빛났던 시절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형제, 친구, 옛 동료가 있는 고국이 좋다고 말하면 많이 섭섭해하실까? 볼거리 할 거리 즐길 거리가 무진장 많았던 뉴욕이었지만 그래도 외로웠다. 어쩌면 그 고독의 무게가 문학을 하게 만든 힘이 되었지만 말이다. 잊고 있던 선생님께도 고마움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카드를 고르다 보니 문득 손수 써 보내주셨던 오래된 편지와 함께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마 이 겨울에 아버지의 기일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타지에 보낸 자식들의 안부와 바람을 양면 괘지에 한자를 섞어 가며 펜으로 꾹꾹 눌러써 보내주셨다. 겉으로는 엄하셨지만, 삶에 대한 넉넉한 자세와 딸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던 아버지의 편지. 오십 년이 다 되어 가는 그 편지를 나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늘 부치지 못한 추신으로 남아 있다.      



 젊은 날, 편지는 우리에게 낭만과 그리움을 대신해 주던 메신저였다. 사랑한다는 말은 유치하다며 연시를 적어 보내기도 했고, 헤어지자는 말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치부하며 이별의 시로 대신하기도 했다. 주고받은 편지에는 우리 삶의 즐겁고 다정한 이야기들과 때로는 안타깝고 아쉬운 사연들이 그대로 묻어 있다. 닿을 수 없는 인연들에 혼자만의 말을 건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춥고 긴 겨울밤,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편지를 쓰는 사람은 행복하다/편지를 받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 아직 그리움이 이어져 있다는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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