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스캐빈, 돌체, 명동예술극장, 동방 살롱과 문예서림. 비록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청춘과 문화가 꽃피었던 명동길, 그 낭만의 시대를 걸었다. 명동성당, 이재명 의사 의거비와 윤선도 집터, 이회영 6형제의 집터까지 명동에 남겨진 옛 문인들과 의인들의 발자취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경성 최고의 번화가며 명동의 빛과 그림자인 한국전력 사옥과 중국대사관 거리, 옛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경성우체국(서울중앙우체국) 자리도 돌아보았다. 동료들과 함께 '관광서포터즈 역량 강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명동 도보 탐방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길은 여전했지만, 시간은 40년을 훌쩍 뛰어넘어있었다.
명동은 나와 비슷한 젊은 시절을 가진 이들에겐 낭만을 즐기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창 시절, 신촌을 무대로 놀다가 더 큰 일(?)이 생기면 명동으로 나와 싸돌아다녔다. 명동길을 따라 영화를 보기도 하고 생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삼일로 창고극장을 찾기도 했다. 문득 지금은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추송웅 배우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 생각났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빨간 피터의 고백’은 아프리카 밀림에서 잡혀 와 서커스 스타가 된 원숭이 이야기다. 빨간 피터 원숭이가 학술원 회원 앞에서 스스로 인간화 과정을 보고하는 모노드라마였다. ‘빨간 피터’를 연기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동물원 원숭이 우리 앞에 있었다는 이야기와 원숭이 흉내까지 내다 경찰에 신고당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는 실험정신으로 70~80년대를 빛냈던 연극계의 큰 별이기도 했다. 동료 중에 나와 연식이 비슷한 이가 있어 명동의 추억을 함께 소환하며 길을 걸었다.
명동성당은 내게는 참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교에 대한 갈등과 번민으로 우울했던 젊은 날의 방황을 떨쳐내고 사십이 다 되어 첫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지금은 또다시 냉담에 들어가 있지만 명동성당에서의 첫 영성체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교리를 공부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었던 곳은 어디쯤이었을까? 그때 그 신부님은 아직 이곳에 계실까? 오랜만에 올라온 명동성당은 여전히 근엄하고 아름답고 경외로왔다. 한때는 힘없고 핍박당하고 내 몸 하나 뉠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했던 곳, 많은 생각이 오갔다. 1898년 조선 최초의 순교자였던 김범우의 집터에 설립했다는 명동성당을 내려오며 오병이어(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떡) 형상으로 1898을 의미하는 안내표지판이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가끔 이렇게 폐허가 돼버린 시간에 온기를 불러오고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달러 골목으로 들어서서야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전히 골목길은 허름한데 중국대사관 담벼락만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담, 문득 담 지고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는 명례방,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이라 불렀던 명동이라는 낭만적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회색빛 담장이 오늘 두 나라의 거리만큼 높아 보였다. 가끔 담벼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아이들의 움직임과 이들의 함성만 높게 울려 퍼졌다.
대사관 건물 코너에 이르자, 맛집인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점심을 기다리는 손님들, 우리도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섰다. 약간의 추위와 배고픔 때문인지 허기는 밀려오고 불맛 때문인지 동네 중국집하고는 맛이 사뭇 달랐다. 중국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맛있게 중화식 요리였다. 역시 맛집은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명동길을 벗어나 소공로로 향했다.
이제는 이름도 아득한 미도파 백화점, 어느 해 어린이날엔가 쇼핑하다 아이를 잃고 방송으로 찾아 헤매던 기억도 떠올랐다. 시간은 참 무상하고 우리는 여지없이 나이 들어버렸다. 옛 서울청사 쪽에 이르니 매스컴에서만 보았던 서울 야외도서관이 성대하게 열려 있었다. 올해로 3년 차를 맞은 서울 야외도서관은 서울시민이 뽑은 정책 1위에 꼽힐 정도로 호응이 뜨거운 곳이다.
광장에는 책 상자와 빈백과 벤치, 파라솔이 비치되어 있었고 상설무대도 만들어져 있었다. 주중이라 그런지 번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푸른색과 분홍색이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음악을 들으며 빈백에 앉아 서울의 이름다운 석양을 담은 사진집을 읽었다. 외국에 살면서 늘 부러웠던 것이 동네마다 있는 공원과 도서관이었다. 문득 이 둘이 합쳐져 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도 문화적으로 선진국이 되어간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뜨거운 햇살이 조금 부담되기는 했지만, 발아래 잔디는 물빛에 반짝거렸다.
집을 나서면, 반기는 이 없어도 갈 곳은 많다. 고궁도 찾아가고, 중단했던 갤러리 탐방도 이어가고, 한 달에 한두 번은 남한산성에도 올라야 한다. 나이 들어 좋은 것은,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층계 밑에서 핸드폰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외국인 두 명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직업 본성이 발동하여 얼른 다가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묻는다. 경복궁 가는 길을 묻는 호주 여행객에게 지하철 지도를 함께 보며 안내해 주었다. 역량 강화교육도 잘 받았고 맛있는 점심도 했고 잠시 책도 읽었으며, 비록 자원봉사지만 본업인 관광 안내까지 했으니 오늘도 잘 살았다. 지하철 안은 여전히 붐비고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 순간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