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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Feb 17. 2024

유.타.네.시.아 혹은 플랜 80?

사과나무 아래


  'Euthanasia(유.타.네.시.아)'.

참 예쁜 단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 안락사라는 의미를 알고 나서는 꽤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우리 문화에서는 입으로 꺼내기도 쉽지 않은 이 단어가 호주 생활영어 클래스 교재에 나와 있었던 시절,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토론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이제 겨우 30대였다. 죽음은 아주 멀리 있다 생각했다. 


 휠체어를 탄 병들고 늙은 노인을 무차별 사살하고 자신도 총으로 자살하는 젊은 청년. 그는 유서를 남긴다. '넘쳐나는 노인이 국가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 이상은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일본의 미래.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플랜 75'를 통해 노인들의 죽음을 지원하는 제도를 수립한다. 

 미치는 남편과 사별하고 가족 없이 살고 있는 78세 독거노인이다. 호텔청소부에서 강제은퇴를 당한다.  아직 일하고 싶고 일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제도가 그녀를 수용하지 못한다. 결국 생활지원금도 받을 수 없고 거처도 잃게 되자 어쩔 수없이 '플랜 75'를 신청한다. 정부는 신청하면 우선 10만 엔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일종의 씁쓸한 보상 같은 것이다. 장례와 화장 등 뒷마무리도 정부가 대신한다. 때로는 합장하기도 하고 유골은 어디론가 재생에너지로 공급되기도 한다. 

 젊은 청년 히로무는 노인들로부터 신청을 받고 서류 만드는 일을 하는 시청직원이다. 어느 날 그는 삼촌이 '플랜 75'를 신청하는 것을 알게 되나 친척관계라는 이유로 담당자가 바뀌게 된다. 삼촌의 마지막이 다가올 즈음 히로무는 삼촌을 모시고 점심과 약주를 대접한다. 자신이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죄책감 같은 것 때문이지 않았을까. 삼촌이 마지막 여정을 마치기 위해 '죽음의 병상(안락사 시설)에 누워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삼촌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죽은 삼촌을 자동차에 태우고 화장터를 찾아 급히 달리다  과속으로 경찰에게 제재를 당한다. 

 미치는 시설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린다. 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진다. 결국 죽음을 거부하고 시설을 나온다. 힘든 호흡 사이로 그녀가 부르는 노래 '사과나무 아래에서 어두워오는 석양을 바라보며...... 내일도 또 만나자...'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이제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희망으로, 다시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인사를 건네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앞날은 어떨까? 어느 날, '당신의 죽음을 국가가 지원합니다'라는 팸플릿이라도 받게 되면 어떤 마음이 될까? 요즘 우리 사회도 안락사란 말이 언론이나 인터넷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죽음을 얘기하기에는 우리 문화가 그리 친절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얼마 전  '부부가 둘 다 많이 아팠고, 서로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는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의 안락사 부고를 전하는 기사를 읽었다. 93세 동갑인 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맞잡고 있었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세계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다. 

 우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중단할 수 있는 소극적 존엄사 정도를 허용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안락사 약이 불법거래되고 있다는 또 다른 기사는 안락사가 우리 주위에 가까이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해당 약물을 팔거나 사기만 해도 처벌 대상이 된다는데 2017년 이후 최소 10명이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10명 중 8명은 난치병환자가 아니라 20, 30대였다고 한다. 또한 해외에 나가 안락사하는 환자수도 매년 늘고 있다 한다.  

'안락사는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 '위엄 있게 죽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등의 논의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도 안락사나 의사 조력자살에 점차적으로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다.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 고통을 끝낼 환자의 권리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한편, 고통이 심한 난치병환자들이 대안으로 삼을만한 완화의료서비스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77이라는 숫자를 참 좋아했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목표지점을 77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죽음을 그저 낭만적인 숫자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플랜 75'를 보면서 나의 플랜은 어디쯤으로 할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무엇보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기 어렵다면 안락사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될 것 같다.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에 곧  닥쳐올지도 모르는 '플랜 75' 같은 경고를 두려움으로 혹은 디스토피아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75세 언저리쯤에 난치병이나 말기암 같은 질환으로 고통받는 세대에게는 그리 두렵거나 아주 불가능한 대책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 합장하면 덜 외롭겠다'는 말은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든다. 소소한 일상에서 친구와 주변 이웃들을 챙기며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미치처럼 늙고 나이 들어가지만 나름대로 삶의 의지와 위엄을 지니고 살아가려는 노인들도 많다. 감독은  '플랜 75'에서 다양한 개인의 선택을 통한 노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되돌아봄으로써 고령화사회에 대한 근본적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영화지만 곧 닥쳐올 일본사회의 예견이 우리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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