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
아침마다 조간신문을 읽는 편이다. 일간지의‘생각 근육을 키우는 도구',‘새로 나온 책',‘스토리와 치유’등의 기사를 읽다 보면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핸드폰으로 올라와 있는 기사도 읽는다. 하고 많은 기사와 사건 중에 왜 이런 글이 내 핸드폰에 올라와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벌써 앨고리즘 세계에 정복당하고 만 것인가?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작고한 정강자 화가의 작품전이 열린다는 기사였다. 아마 그녀의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순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강자 화가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후반쯤이다. 아이들이 그림 공부하러 다녔던 반포주공아파트 상가에서였다. 지금은 재건축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그녀가 나온 대학의 이름을 딴 H 미술학원. 처음에는 학부모로, 다음에는 데생을 배우는 학생으로 관계가 발전되었다. 그녀가 한국 최초의 누드퍼포먼스를 했다는 사실과 인도네시아 염색법인 바틱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살림집 겸 화실인 상가건물에서 두 남매를 기르며 생계와 양육과 예술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녀의 도전과 실험정신을 높이 사긴 했으나 그녀의 화풍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거친 화법이 왠지 내게는 조금 두려웠다. 그녀가 말했듯 ‘온실 속의 꽃’처럼 살아온 나는‘잡초처럼 살아왔다’라는 그녀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한동안 외국에 나가 살다 보니 그녀와의 인연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그녀가 선물한 아크릴 작품과 판화 작품-‘꿈꾸는 누드’, ‘화가의 초상’, ‘기다리는 여인’-은 아직 간직하고 있다. 몇 년 전 귀국해서 그녀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하늘의 별이 되어있었다. 왠지 인연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강자 화가는 대표적인 한국 여성 아방가르드 작가이자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로서,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 시절, 일반적이지 않은 그녀의 행보는 국내 화단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시장에는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의 작품들이 그녀를 대신하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원시의 삶을 찾아 여러 세계를 여행하며 자신의 꿈을 투영한 환상적 이미지의 그림들. 특히 반원을 등장시킨 말년의 작품에서는 무한한 상상을 통해 당대의 억압적 현실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려 수없이 도전했을 작가의 투혼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원시적이고 토속적인 기운이 흐르는 그림들, 그녀는 자기만의 토속적 본질을 기반으로 수없이 변신하고자 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남겨진 그림에서 잠시 스쳐 간 인연을 되돌아보는 일은 왠지 쓸쓸했다. 한 사람이 가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닿을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황망함만이 차가운 바람과 함께 북촌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진한 커피 한잔을 하는 것이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갤러리가 있는 북촌로는 여전히 번잡했고 국밥집도 별다방도 북적거렸다. 수많은 직장인 사이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잠시 혼자, 대로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