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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Nov 30. 2023

그림으로 다시 만나다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

 영하의 날씨, 오랜만에 길을 나선다. 두 달 동안 거의 같은 일에만 매달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브런치스토리로부터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생각이나 글이 잘 모아지지 않았다. 그동안, 몇 편의 글을 묶어 브런치북으로 발행하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문학지원금에 지원하느라 진이 조금 빠졌다고나 할까.

 요즘도 아침마다 조간신문을 읽는다. 핸드폰으로 올라와 있는 기사도 읽는다. 하고 많은 기사와 사건 중에 왜 이런 글이 내 폰에 올라와 있을까 잠시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세상의 하루를 연다. 특히 '생각근육을 키우는 도구', '새로 나온 책', '좌충우돌 인생 이야기', '스토리와 치유', '횡설수설' 같은 기사들을 읽다 보면 아직도 모르는 것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눈에 띄는 기사는 작고한 정강자 화가에 관한 기사였다. 때마침 그의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은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2023-2024)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순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정강자 화가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후반쯤이다. 아이들이 그림공부를 하러 다녔던 반포주공아파트 상가에서였다. 지금은 재건축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그녀가 나온 대학의 이름을 딴 H미술학원. 큰 아이는 그림을 그리면 화폭 안이 풍성한데 비해 작은 아이는 그림 속 내용이 빈약하다는 말에, 두 아이의 상상력과 감성과 스토리를 풀어내는 힘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학부모로, 다음에는 데생을 배우는 학생으로 관계가 발전되었다. 어쩌다 라면도 함께 먹기도 했고 커피 한 잔을 같이 하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가 한국 최초의 누드퍼포먼스를 했다는 사실, 인도네시아 염색법인 바틱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살림집 겸 화실인 상가 건물에서 남매를 기르고 있고 가수 남일해가 그녀의 오빠라는 사실 등 개인사도 조금 알게 되었다. 생계와 양육과 예술을 병행하며 사는 그녀의 도전과 실험정신을 높이 사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의 화풍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거친 화법이 왠지 내게는 조금 두려워 보였다. '온실 속의 꽃' 같은 내가 심리적으로 허약해 보였는지 그녀는 '나는 잡초처럼 살아 그런지 아픈 것을 모르고 산다.'라는 말을 가끔 했다.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말 같았다. 

 그 후 한동안 외국에 나가 살다 보니 그녀와의 인연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해외로 나갈 때 그녀는 표구한 작품 한 점과  판화 몇 점을 선물로 주었다. '꿈꾸는 누드',  '화가의 초상',  '기다리는 여인'은 그녀의 에세이집과 함께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몇 년 전 귀국해서 지난 인연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하늘의 별이 되어 있었다. 왠지 인연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대표적인 한국여성 아방가르드 작가이자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였다. 1960-70년대 한국 실험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녀의 일반적이지 않은 행보는 국내 화단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 화랑에서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나와 닿지 않았던 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녀 삶의 명제인 예술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와 특유의 도전의식이 돋보였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원시의 삶을 찾아 다양한 세계를 여행하며 자신의 꿈을 투영한  환상적 이미지의 그림들. 특히 반원을 등장시킨 그의 말년의 작품들에서는 회화의 무한한 상상을 통해 당대의 억압적 현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수없이 도전했을 작가의 투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남겨진 그림에서 잠시 스쳐간 인연을 되돌아보는 느낌은 왠지 쓸쓸했다. 원시적이고 토속적인 기운이 흐르는 그림들, 어쩌면 그녀는 이 토속적인 그녀의 본질을 기반으로 수없이 변신하고자 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한 사람이 가고 그가 남긴 족적을 따라가다 보니, 닿을 수 없었던 시간들에 대한 황망함만이 차가운 바람과 함께 북촌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진한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이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갤러리가 있는 북촌로는 여전히 번잡했고 국밥집도 별다방도 북적거렸다. 수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나는 그만 길을 잃고 잠시 혼자 대로에 서 있었다.


 숲에서의 오수(정강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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