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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Oct 18. 2023

우리가 되어가는 시간과 공간

유머와 해학을 읽는 시간

 최근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회가 연일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수려한 대리석 기둥을 가려버린 전시회 포스터, 로비 바닥을 뚫고 나온 카텔란 자화상, 천장에 매달린 말의 사체. 조용하고 평면적이던 미술관을 요지경으로 바꾸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술관 탐방을 좋아하는 나도 며칠째 온라인으로 예매를 시도했지만 이제야 겨우 티켓을 구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미술관 앞에는 이미 많은 관람객으로 붐볐다. 

 

 입구에서 <동훈과 준호>를 만났다. 우리를 문 앞에서부터 노숙자와 만나게 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다 문득 어느 추운 겨울날 서울역 앞에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던 노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가나 전철역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노숙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사실 그들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달프고 지난한 여정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박제된 비둘기들이 지켜보고 있는 안내 데스크에 가서 디지털 가이드를 대여받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앞 벽면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발바닥 벽화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 버. 지. 가만히 속으로 불러보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내게는 아픔이고 위안이며 때로는 서늘함으로 다가오는 존재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던 아버지를 기념하며 만들었다는 작품, 까지고 파이고 상처 난 발바닥에서 외롭고 힘들었을 세상의 많은 아버지의 발걸음이 느껴졌다.

 <우리>라는 작품은 작가를 닮은 두 사람이 마치 장례를 치르는 듯한 엄숙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백하고 무표정하게 보이는 이들은 예술가 자신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수없이 많은 가면을 쓰고 개인과 사회, 규제와 자유, 관심과 무관심 사이를 오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 본래 자기 자신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 정체성 혼란을 말하는 듯했다. 

 뒷모습을 보인 채 앉아 있는 <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에서 소년의 손은 마치 못이 박힌 것처럼 연필로 책상에 찍혀 있었다. 학업 때문에 책상 앞을 떠날 수 없는 우리 교육 현장이 떠올라 조금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작가 자신의 평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있는 걸까. 사실 그는, 어린 시절의 괴로움을 생각하면 공황장애가 올 것 같다거나 온갖 세상의 체계들과 규칙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려고 많은 애를 썼다고 했다. 학교와 사회, 규율과 제도 속에서 그와 유사한 경험과 고통을 겪었을 사람들에게는 많은 부분이 공감되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 찰리는 이제 하루에 서너 번씩 세발자전거를 타고 전시장을 놀이터처럼 돌아다닌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 작가의 풍자가 느껴졌다. 

 작은 방에는 마치 KKK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채 코와 눈만 빠끔히 내놓고 있는 커다란 코끼리가 <사랑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문득 ‘방 안의 코끼리’라는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초래될 위험이 두려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사회적 갈등을 시사하는 작품 같았다. 어쩌면 거대한 몸집 아래 숨어 오히려 사랑이 두렵다거나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하면서도 극사실적인 조각과 회화, 사진과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을 돌아보며 작가가 느꼈던 불안과 혼란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냉장고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 운석을 맞고 쓰러진 교황, 특히 머리 없이 몸통만 벽에 걸린 말 <무제>와 같은 작업은 상당히 도발적으로 보였다. 힘껏 달려온 말의 머리는 잘려 나간 채 몸통만 높은 벽에 걸려있는 작품. 성공 지향적인 삶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우리에게 성공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성공의 끝은 어디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도 그 벽 뒷면이 궁금했다. 

 이렇듯 대중이 보기에는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은 그의 작업 세계에는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와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던 그의 경험들이 깔려 있을 것이다. 작가의 시선에서 이 세상은 이미 웃기고 서글프고 가끔은 극도로 도발적인데 우리가 평소에 그런 현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혹은 관심을 가졌어도 제대로 행동하지 않았음을 꼬집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전시장 안은 무거웠으나 창 너머 보이는 미술관 밖은 눈부신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어디선가 양철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 갔다. 전시와 관련하여 배우들의 퍼포먼스가 열리는 시간이었다. 한 번뿐인 특별한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니 운이 좋았다. 전시장인지 연극 무대인지 배우와 관람객이 구분되지 않는 전시장은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좁혀 놓은 듯했다.     

 길거리에 앉아 있는 노숙자, 청소하는 미화원과 쓰레기를 줍는 아저씨도 보였다. 지친 소방관과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군인. 어디론가 도망치는 사람과 호루라기를 급하게 불어대는 경비원. 그들 사이를 무심하게 오고 가는 수녀와 성직자. 하얀 드레스의 날렵한 신부와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가는 사람. 세상을 더 이상 웃길 수 없어 그만 지쳐 앉아 있는 광대까지 현실의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특히 비극적 죽음과 참사를 떠오르게 하는 아홉 구의 시체를 뒤로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맛있게 먹고 아무 데나 버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퍼포먼스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작가는 노숙자, 범죄자, 경찰, 예술가, 사제, 광대를 동원해 삶과 죽음의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시회 ‘우리(WE)’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어가는가,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가 아닌 나와 너, 나와 그(녀)가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고 때로는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살아가는 용기와 의미를 주는 일일 것이다. 아직 우리가 되지 못한 나의 관계들을 돌아보며 나만의 안락함 속에서 혹은 나이를 핑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작가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을 보여주며 우리를 알아가는 시간, 우리가 되어가는 시간과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기존의 미술관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불편하고 민감한 이슈를‘아름답게 때로는 선동적으로’ 드러내 관람객을 현실과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인 전시장, 작품들은 유쾌하고 자유분방했으나 해학과 풍자를 읽는 마음은 오히려 숙연해진 미술관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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