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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Oct 01. 2022

우리, 함께 걸을까요

함께라는 말

 혼자 걷는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그리 서두를 일이 없는 나이, 자꾸만 느슨해지는 일상을 조여보자고 시작한 자원봉사 가는 날이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짐짓 느긋한 걸음을 걸어본다. 얼마 전 폭우로 쓸려나갔던 장지천 길가가 돌과 흙으로 다시 단단하고 보기 좋게 다듬어졌다. 그동안 애쓴 공원 관리인들의 노동과 노고에 대한 고마움은 감사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여름 볕 아래서는 조금 빠르게 걷지만 오늘 같은 가을볕 아래에서는 조금 느리게 걷는다. 천천히 걷다 보면 우울했던 기분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일상의 매듭과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한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가을 햇살과 함께 걷다 보면 행복, 평화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삶의 경이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폭포처럼 쏟아지는 한낮의 가을볕 아래서는 문득 길가에 나앉아 좌선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비 내리는 날에는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빗줄기의 간지러움이 좋고 눈 오는 날에는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걷는 일도 좋다. 추억 속 사라진 길들을 찾아가던 발걸음은 낯설기는 했지만 새뜻함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다. 어쩌면 내겐 계절 내내 자연과 함께 걷는 일이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는 가장 값싸고 질리지 않는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은총이며 고마운 선물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걷기는 해 질 녘 어슬렁거리며 걷는 걸음이다. 늦은 오후 햇살은 왠지 하루를 떠나보내는 손길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어린 왕자가 살았던 작은 행성에서는 의자만 조금 움직이면 지지 않는 석양을 내내 볼 수 있다고 했다. ‘지는 석양을 좋아하는 사람은 조금 쓸쓸한 사람’이라던 어린 왕자를 떠올리며 나도 볕 자락을 따라 마냥 걷기도 하고 가끔은 쓸쓸함 속으로 걸어보기도 한다. 특히 저녁 잔 빛을 뒤로하고 동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식구들이 밥상으로 모여드는 발걸음 소리도 입속으로 사라지는 고단함도 정겹게 들린다. 고요해서 놓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골목마다 수런대는 시간, 아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블루 아워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는 온 우주가 실리는 느낌이 든다. 이런 시간의 걷기는 황홀함 그 자체다.


 어느새 장지천과 탄천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렀다. 온갖 수초와 쓰레기를 허벅지까지 휘두르고 있던 참느릅나무와 능수버들도 깔끔하게 단장을 끝냈다. 쓰러진 채로 넘어져있던 나무들은 어디론가 치워져 버렸다. 어쩌면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탓에 곧추세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어머니의 무너진 다리가 떠올랐다. 무릎 수술 후 재활에 성공하지 못한 채 5여 년을 요양병원에 누워만 계시다 가신 지 1년이 되었다. 휠체어도 간병인도 더는 도움이 되지 않아 끝내 침상에서만 세상을 전해 들으시던 어머니의 지난한 시간들. 당신의 존재는 물론 이웃과 세상을 연결해 주던 버팀목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걸을 수 없음에 대한 절망과 안타까움의 깊이를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걷다 보면 이렇게 잊고 있던 시간과 만나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게도 된다. 내게 있어 걷기는 삶의 위안이요 활력소며 희망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걷기>라는 글에서 동네 사람들이 사회와 일상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흔히 일상에서 걷기의 반은 되돌아오는 것이지만 진정한 걷기란 일상을 뒤로하고 모험심에 차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어쩌면 현실에 얽매여 사는 나에게도 영원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싶다. 


 나만의 호흡과 생각에 잠겨 혼자 걸었던 길을 뒤로하고 이제는 짜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지점. 어디선가 환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반가움에 나도 문득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걸었다. 산책길도 살아가는 일도... 걷는 일은 영원한 나의 미션이며 소망이다. 우리, 함께 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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