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서 또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또 하나의 방법
아침노을 사이로 달리던 버스가 퍼플섬 입구에 들어서자 보랏빛 세계가 펼쳐졌다. 순간 몽환적인 보라색이 주는 나만의 이미지들을 연상해 보았다. 제비꽃 시인, 스페인의 자카란다, 스파 살롱의 라벤더향 그리고 어머니의 보라색 코트까지. 물이 빠진 바다는 감흥이 덜 했지만 도시인의 가슴은 더없이 출렁거렸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퍼플교 입구에서 마스크를 쓴 채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이드는 1시간 30분을 주고 오천여 보 되는 퍼플교를 돌아 나오라고 했다. 마을 안까지 둘러볼 시간은 애초부터 계획에 없었으니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들 기념사진을 찍느라 퍼플교는 갑자기 분주해지고 높아진 목소리에 조용하던 갯벌은 놀라 옴짝거렸다. 그래서일까 뻘 속에서 조그만 생물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게인지 새우인지 알 길 없는 그들을 혼자 한동안 내려다보느라 일행을 놓치기도 했다. 멀리 해오라기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텅 빈 갯벌, 드넓은 그 조용함이 좋았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시간이면 이내 바다는 출렁거리고 부산해질 것이 틀림없다.
섬은 그냥 보랏빛.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먼 산과 갯벌과 보랏빛 다리 그리고 음악소리가 아침과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가 어쩌면 이렇게 여기에 안성맞춤일까 싶었다. 첫 번째 다리를 건너 900년의 우물과 바람의 정원이 있다는 박 모양의 섬 박지도를 만났다. 이 섬에 살던 할머니의 '걸어서 육지에 나가고 싶다'던 소원을 들어주려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는 퍼플교. 보라를 입힌 지붕, 트랙터, 쓰레기통까지 온통 보라 보라였다.
박지도에서 반월도로 들어가는 퍼플 다리에서는 음악도 세미클래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 무심히 걷다 옆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며 잠시 여럿이 되기도 했다. 작은 벤치마다 '근심 걱정 여기 내려놓고 가세요', '오늘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따뜻한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봄꽃 라벤더는 이미 지고 버들마편초가 보라색을 이룬 반월도. 건너온 다리를 뒤돌아보며 스쳐간 시간들을 잠시 되새겨보았다.
일상으로부터 떠난다는 일은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다. 아직 살아있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반월도를 지나 다시 안좌도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사진을 찍고 퍼플섬을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패키지를 따라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남는 아쉬움이다.
그동안 코로나 사태로 한동안 공항 밖을 나가보지 못했다. 7월쯤 용기를 내 무더위를 피하고자 호주 여행을 계획했지만 예정 일정이 다가오자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루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나 여전히 떠나지 못함에 대한 미련이 남아 한 달을 마음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다 겨우 지난 주말에 다녀온 신안 퍼플섬.
나는 혼자 여행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처럼 배낭 하나 메고 지도에 의지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는 못한다. 좋은 여행 프로그램 패키지를 이용하는 편이다. 사실, 패키지 따라다니는 여행은 혼자라도 어려움이 거의 없다. 주변 사람들은 가끔 익숙하지 못해서 용기가 없어서 아니면 나이 들어서 혼자 선뜻 떠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첫걸음이 항상 어려운 법이다.
요즘은 혼자 여행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말을 건네는 편이다. 이것이 나이 들어감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함께 셋이 왔다는 팀과 저녁을 먹으며 술 한잔을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하는 50대 여성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하다고 내가 물었고 열심히 일하고 불밤 금요일에는 술을 마시고 또 가끔은 이렇게 여행도 다닌다고 그들이 답했다. 50대, 무엇을 해도 아직 가능한 나이다. 어디로 떠나도 두렵지 않은 나이다.
나는 아직도 혼자 떠나기를 꿈꾼다. 때로는 몸이 때로는 마음이 자꾸 길을 막아서지만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게을러질 때마다 스스로를 자꾸 흔드는 수밖에 없다. 9월부터는 광주 송정역과 목포역에서 퍼플섬을 오가는 신안 시티투어버스가 운행된다고 한다. 보라색 아스타 국화꽃이 만개할 가을쯤 넉넉한 시간과 함께 다시 찾아오고 싶은 섬이다. 눈 내린 퍼플교도 멋있지 않을까 겨울 속 퍼플섬도 상상해 본다.
떠나는 일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 혼자라도 좋다.
함께 웃고 어울리다가도 돌아서면 혼자가 되고 밥 먹고 걷다가도 돌아오면 또다시 혼자가 되듯, 사는 일은 그렇게 세상과 함께가 되기도 하고 혼자 남게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