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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Jun 11. 2024

가지를 치다

 

 

 '국제도시’라 이름 붙은 청라,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반을 왔으니 내가 사는 곳 동쪽에서 보면 서쪽으로 멀리도 왔다. 그녀의 집을 처음 방문하면서, 재산도 건강도 소중하지만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가 더 오랫동안 귀중한 덕목으로 남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김 선생과 나는 30년이 넘은 친구 사이다.      


1. 김 선생

 그녀는,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유형으로 본다면 ENFJ 유형이 아닐까 싶다. 매사에 활력이 넘치고 실행력이 높고 창의적이다. 늘 우리를 즐겁게 하고 설레게 하고 들뜨게 한다. 오늘도 스스로 개발한 특별 소스를 얹은 샐러드, 가지요리, 두부 두루치기를 곁들인 점심을 내놓았다. 어디 그뿐인가. 저녁 찬용이라며 짜장 소스를 만들어 손에 건네준다. 마치 친정에 왔다 돌아가는 푸근함을 선물한다. 그녀에게는 상대방에게 끌림을 유도해 낼 수 있는 매력, 능력, 스타일, 호감을 말하는 리즈(rizz) 있지 않나 싶다. 활달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녀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보석에 대한 특별한 안목까지 무엇이나 만능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그녀. 언젠가는 그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한번 분석해 보고 싶다. 김 선생은 아직 현역이다.     


1. 이선생

 이 선생은 전문상담가로 대학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은퇴 후 서울시 산하 상담 분과에서 일하다 얼마 전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동안 상담해 온 내담자들에 대한 후속 서비스와 학교 선후배와의 파트너쉽 등으로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영종도에 공유사무실을 얻어 상담 일을 계속하고 있다. 

 상담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신뢰 그리고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분야다. 이 선생을 볼 때마다 그 열정과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나이를 모르고 사는 그녀가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그녀를 만나면 내가 모르는 파격적이고 다양한 세상살이를 들을 수 있어 신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1. 우리

 우리는 아주 오래전 시간강사 시절에 만났다. 처음엔 다섯 명이어서 이름도 더 파이브(the Five)로 지었다. 가장 젊은 김 선생과 가장 나이 많은 나와의 차이가 10년, 그래도 우리는 친구라 불렀다. 그때만 해도 우린 젊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문직으로 일자리를 얻었으니 성공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이민을 가거나 지방 근무로 다섯 명 모두가 함께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개성도 각 각이었고 개인의 선호 경향도 외향성(E)과 내향성(I), 감각적 인식(S)과 직관적 인식(N) 형, 사고적 판단(T)과 감정적 판단(F) 형으로 달랐다. 직업적인 특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외부 세계에 대처하는 성향은 대체로 인식적 태도(P)보다는 판단적 태도(J)를 선호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말로 끝나지 않고 책이나 결과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다양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도 지금까지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김 선생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식이 뜸하면 연락도 취하고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전달해 주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셋이 주로 만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파이브 모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행에서 운동으로, 물가에서 사회문제로 오가다 결국에는 남은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모두 은퇴와 노후와 죽음에 관한 이슈가 큰 관심사였다.     

 

1. 히나

 오늘 새로 합류한 히나는 일본인이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젊은 대학 강사다. 히나와 김 선생은 당근마켓에서 만났다. 알고 보니 둘은 이웃 동네에 살고 있었고 중고 거래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사람의 인연은 신기하게 이렇게 닿기도 한다. 히나와 김 선생도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정엄마가 일본에 있는 히나, 자녀가 모두 외국에 나가 있는 김 선생. 결국 둘은 엄마와 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그녀의 이모가 되었다. 

 그녀는 요즘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아들 양육권을 내주려고 하지 않아 힘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합의금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고 했다. 결혼할 때 그녀의 지참금으로 얻게 된 집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해주지 않는단다.

‘윽, 개 같은 세상!’, ‘에이, 못된 사람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우리는 한 마디씩 억울함을 대신해 주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더러는 새로운 가지를 치기도 하고, 전정가위로 잘라내듯 불편한 관계를 가지치기하기도 했다. 어쩌면 사는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 곁가지를 잘라내는 일이기도 하고, 오늘처럼 모르는 사람과 새로운 가지를 치는 일이기도 하다. 더 파이브는 30대에 새 가지를 친 소중한 인연이다. 

 나이 들어서는, 새로운 가지치기를 하며 함께 가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가지를 쳐서 새로 얻게 된 조카, 그녀와의 또 다른 삶의 관계가 기대된다. 이혼 합의와 양육이라는 버거운 짐을 안고 있는 이 젊은이에게는 어쩌면 꼰대 같은 섣부른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우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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