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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Jun 11. 2024

가지를 치다

 

 ‘국제도시’라 이름 붙은 청라, 처음 나서는 길이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반을 왔으니 내가 사는 곳 동쪽에서 보면 서쪽으로 멀리도 왔다. 서울을 벗어나서일까 생경한 밖의 모습이 왠지 신선해 보였다. 처음 가는 길은 늘 이렇게 낯설고 설렌다. 

 정 선생이 알려준 주소를 따라 걷다 보니, 주변에 공터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이곳도 머지않아 대단위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것 같다. 그녀의 집 30층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넓고 광활했다. 날씨가 흐려 시야가 넓진 못했지만, 해 좋은 날에는 멀리 영종도 바다까지 보인다고 하니 역시 고층에서의 전망은 돈값을 한다.      


 지난 모임에서처럼 정 선생 집에서 김 선생과 나 셋이 모였다. 나중에 히나가 초대받아 합류했다. 우리 셋은 아주 오래전 시간강사 시절에 만났다. 아마 30년도 넘었을 것이다. 처음엔 다섯 명이어서 이름도 더파이브(the Five)로 지었다. 그때만 해도 젊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문직으로 일자리를 얻었으니 성공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든든한 자리는 곧 은퇴하게 될 정 선생이다. 사실 다섯 명 모두가 함께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러는 해외에 거주하기도 하고 소식이 끊어지기도 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도 지금까지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정 선생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 선생은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유형으로 본다면 ENFP 유형이지 싶다. 매사에 활력이 넘치고 실행력이 높고 창의적이다. 늘 우리를 즐겁게 했고 설레게 했고 들뜨게 했다. 오늘도 그녀는 스스로 개발한 특별한 소스를 얹은 샐러드, 가지요리, 두부 두루치기를 곁들인 점심을 내놓았다. 어디 그뿐인가. 집에 돌아가 저녁으로 먹으라고 짜장 소스를 만들어 손에 건네기까지 마치 친정에 왔다 돌아가는 것 같은 푸근함을 선물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가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리즈(rizz, 상대방에게 끌림을 유도해 낼 수 있는 매력, 능력, 스타일, 호감 등을 말함)가 그녀에게도 있지 않나 싶다. 활달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보석에 대한 특별한 안목까지, 무엇이나 만능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그녀. 김 선생은 늘 꼭 한 번쯤은 정 선생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오늘 새로 합류한 히나는 일본인이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젊은 대학 강사다. 히나와 정 선생은 당근마켓에서 만났다. 알고 보니 둘은 이웃 동네에 살고 있었고 중고 거래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언젠가‘당근거래로 만나 결혼합니다.’라는 밥솥 팔다 부부 된 사연이 인터넷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중고 거래로 밥솥 팔다 만나 이제 그 밥솥으로 한솥밥 먹게 되었다는 청첩장도 인상적이었다. 해당 사연을 접한 누리꾼들은 ‘오늘부터 당근 한다, 될 사람은 물건을 팔아도 된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등 다양한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사람의 인연은 신기하게 이렇게 닿기도 한다. 히나와 정 선생도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정엄마가 일본에 살고 있는 히나, 자녀가 모두 외국에 나가 있는 정 선생. 결국 둘은 엄마와 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그녀의 이모가 되었다. 


 살아가는 일은 이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새로운 가지를 치며 함께 걷는 일이기도 하다. 히나는‘엄마’가 준비한 음식들을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우리와의 만남을 이야기로 엮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요즘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녀 양육권으로 애를 먹었는데, 이번에는 합의금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고 했다. 

‘젠장, 남편이 그녀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변호사가 수임료만 먼저 받고 합의금은 제대로 조정해주지 않는다네!’, 

‘세상이 뭐 이래!’ 

우리는 한 마디씩 그녀를 대신해 한바탕 분풀이해 주었다.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혼자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젊은 엄마, 더구나 외국인인 그녀에게 지금 이 세상은 어쩌면 인색하고 치욕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종도에 공유사무실을 열었다는 김 선생, 동료 험담을 유쾌하게 이어가던 정 선생의 수다는 결국 남은 삶을 어떻게 품위 있게 살 것인지로 흘러갔다. 히나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은퇴와 노후와 죽음에 관한 이슈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사는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 곁가지를 잘라내는 가지치기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오늘처럼 모르는 사람과 새로운 가지를 치며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가지를 쳐서 얻게 된 조카, 그녀와의 또 다른 삶의 관계가 기대된다.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젊은이에게는 꼰대 같은 섣부른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우선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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