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돌무렵, 우리는 실내동물원이 있는 키즈카페에 갔다. 남편이 화장실에 간 사이 혼자 아이 이유식을 먹이는데 옆테이블 아빠 두명이 우리쪽을 보며 수근댔다. 사실 무례할 수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화장실에 돌아온 남편에게까지 이야기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인즉슨, "야, 저 아기 좀 봐. 아기가 이유식을 금수저로 먹고있어. 야~ 저 아기는 금수저 물었네!" 아기 이유식 먹였던 스푼이 금색 티스푼이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최성애, 조벽 교수의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라는 책을 읽고 있다. 우리 아이의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움을 얻기위해 정서관련 육아서를 여러권 읽었는데 교육학 전공자인 나로서는 너무 뻔한 이야기들이라 '이론은 아는데 실천이 안된다.'는 문제를 깨닫고 한동안은 꺼내보지 않았던 책이다. 애착이 중요하다고 하여서 만4년을 꼬빡 어린이집도 안보냈는데 어린이집을 더 일찍 갔던 둘째보다 첫째 아이가 더 불안해한다. 그렇다면 아이의 만4년동안 집에서의 인생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남편과 나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진 못했다. 남편은 매우 가난해서 유치원도 못갔고, 친구 생일파티에 선물을 가지고 가야하는데 선물 살 돈이 없어서 집에 있는 (자기 이름이 적혀있는) 새 공책을 생일선물로 가지고 간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대신 조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님끼리 싸우면서 집안에서 큰소리가 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뎌내는 엄마를 옆에서 보고 있어야 했고, 가난한 환경에서 둘째인 남편을 가진걸 못마땅해하시던 할머니는 과자도 형만 주며 형과 남편을 차별하며 대했다고 하셨다. 거기다 형은 사춘기 때 남편을 무수히 때려댔고 어머니는 이를 말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항상 안쓰럽게 생각하셨지만 이불을 만들며 시부모 병수발과 제사 등 생계를 책임지셔야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으셨던 것 같다.
이번엔 내 얘기이다. 나는 늘 혼자였던 것 같다. 기억이 시작되는 시간은 여섯살 유치원에 다녔을 때부터인데 그 때 엄마는 동네에 있는 공장에 다니고 계셨다. 빠뜻한 집안 경제 사정에 하루종일 공장에 가있는 엄마도 무척 고단하셨는지 엄마는 집에 있는 날에는 늘 잠만 주무셨다. 이런 생활은 학교에 가서도 쭉 그랬는데 다른 친구집에 가는게 우리집에 가는 것보다 더 편안하고 따뜻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자기 입맛대로 나를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공부를 썩 잘하는 아이였다. 신기하게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잘 안들렸는데 책을 보면 이해가 가는 스타일이었다. 마음먹고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점수가 잘나와서 부모님께서는 욕심을 부리셨다. 덕분에 나는 초등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내 꿈은 소설가였다.
엄마는 늘 나를 '장난이었는데 구분 못하고 사소한 것에도 화를 내고 기분 나빠하는 이상한 사람', '무엇이든 제대로 하지 못하고 조금 부족한 사람'으로 이야기 했다. 네가 그럼 그렇지, 너 조금 부족하잖아. 라며 내가 무슨 실수를 하면 꼭 그렇게 말씀하셨다. 언니와의 비교도 참 스트레스 였는데 엄마는 무엇을 해도 믿음직한 언니는 대단한 사람이고 나는 무엇을해도 초라한 사람이 되는 신기한 말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엄마아빠는 너무 자주 싸웠다. 시끄러웠다. 욕을 해대고 물건을 던지며 서로 잡아죽일 듯이 싸웠다. 어느 순간 엄마 아빠가 싸우게 되면 언니와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모가 와서 엄마 아빠가 싸우면 말려야한다고 해서 언니는 말리는 일까지 하게 되었는데 나는 도저히 못하겠더라. 그러던 어느 순간 엄마 아빠가 싸우는데 웃음이 났다. 저들은 화를 내는데 저 마음에 공감이 안되었던 나는 그 모습들이 우스꽝스러워보였다. 연극을 보고 있는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한쪽에서는 미친듯이 싸우는데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마음은 어딘가 병적인 부분이 생기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때 학생주임이 우리반에 와서 학생들 보고 책상 위에 올라가서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어느 남학생을 미친듯이 때렸다. 그 아이가 책상에서 떨어질까봐 아슬아슬하던 그 때에도 나는 웃음이 났다. 웃음을 참기위해 미친듯이 이를 앙 물었다. 나는 왜 웃음이 났을까. 모두 무서워서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던 그 때. 나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나의 성격적 결함은 무수히 많은 책들을 보고 무수히 많은 일기를 쓰며 자아를 성찰한다고 해도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나왔다. 나에게는 사소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일들로 너무 크게 화가 났고, 나에게 하는 비난과 지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과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 분리불안 문제로 종합심리검사를 하면서 부모검사도 하게 되었는데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나에게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줄곧 다른 사람의 감정이 다치지 않았을까, 기분나빠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살아왔던 이유도 사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떨어지니 어느 포인트에서 저 사람이 기분 나쁠지 잘 몰랐던 이유에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답답했지만 그 와중에서 내가 엄마를 그래도 이해하는 이유는 엄마도 피해자란 사실이다. 육남매에 다섯째로 홀어머니 밑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소금에 꽁보리밥만 먹은 그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이다. 아빠와 싸우며 갈라서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을테지만 그래도 우리가 걸려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내셨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도 피해자라는 사실. 아빠의 의심많은 성격도 아빠가 태어나면서 부잣집이었던 집이 망하게 되면서 할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신뢰감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에 더는 엄마아빠 탓을 할 수가 없겠다.
다만, 나는 이렇게 살아왔지만, 나의 아이들에게 만큼은 나의 정서적 흙수저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 매번 휘몰아치는 마음속 소용돌이를 마주하게 하고 싶지가 않다. 같은 일이라도 격분하고 화가 치밀어오르기보다 조금 골치아픈 수준으로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길 바란다. 해보고 싶은건 도전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마음의 근력을 키워주고 싶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불안과 마주하며 나의 아이들에게 정서적 금수저를 물려주려면 나는 뼈를 깎는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매일 정서에 관한 책을 읽으며 마을을 다잡아야하고 아이에게 어른답지 않게 감정조절을 못하거나 과도하게 화내는 상황을 기록하고 반성해야 한다. 아이의 불안은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이자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