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려은 Feb 11. 2024

소아정신과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선택 속에서 오늘도 선택을 했지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아이의 종합심리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감기에 걸렸다면서 코가 막힌 소리로 보고서를 설명해주던 의사의 음성은 느릿했다. 아이가 열여섯개의 검사에서 어떤 상태로 평가되었고 임상심리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했다. 의사의 설명에 보고서를 따라 읽어가던 중, 한 구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실제 및 상상적 위협에 취약하며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염려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임'



모호한 자극을 보고 반응하는 Rorschach검사에서 아이는 '이상한 새', '괴물이 걸어온다.' '이상한 두더쥐' '악마가 가뭐를 먹고 있는 것 같다.'등의 반응을 고려할 때, 외부 자극을 부정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구절을 보니 또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동생이 태어나고 시어머니가 오셔서 도와주셨다. 그 무렵 아이는 밥을 한 숟가락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평소 변비도 있어서 밥을 잘 먹지 않으면 변을 볼 때마다 힘들어하던 터라 밥 먹일 때면 아이와 실랑이 하는 것이 너무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너무나 신박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밥을 먹이시는게 아닌가. 창문을 바라보며, 정말 가까이에 온 것처럼....



"경찰아저씨! 여기 밥 안먹는 아기가 있어요. 어서 잡아가세요."



이 말에 평소 겁이 많던 아이는 할머니가 주는 밥을 꿀떡꿀떡 받아먹었고, 우리는 이 방법으로 쉽게 밥을 먹일 수도 있었고, 잠을 재울 수도 있었으며, 우리 마음대로 이 아이를 주물락 펴락 할 수가 있었다. 아이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는 자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이진 않지만 오고 있는 경찰 아저씨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엄마 아빠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어가고 있었다. 눈 앞에 나타나진 않지만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는 미지의 인물이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허상에 휩싸인 채...








아이의 심리검사를 시행한 임상심리사는 아이의 분리불안의 직접적 요인은 아이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약물복용과 놀이치료, 부모교육을 제안 하였다. 나는 아이의 마음에 안정을 찾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기때문에 임상심리사의 제안이 썩 마음에 들었다. 


수납을 하고 놀이치료에 대한 안내를 듣고 처방전을 기다리자 접수처에서는 의사가 처방전을 주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러더니 의사가 약물은 좀 더 지켜본 뒤에 쓰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댔다. 왜 그럴까. 약물이라도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어서 빨리 약을 먹이고 싶었다. 처방전을 받고 싶다고 재차 말하자 접수처 프린터에서 처방전 한장이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하지만 막상 처방전에 적혀진 약을 먹일 생각을 하자 웬지 모르게 두려웠다. 약이 아이를 도와줄거라고 생각하고 병원에 왔는데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마냥 마음이 안좋았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내원하여 약이 맞는지 체크를 해야해서 예약을 잡아야한다고 어느 날짜가 좋겠냐고 접수원이 나를 재촉했다.


다음 예약을 잡아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여졌다. 분명 병원에 오기 전에는 약이라도 먹여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고 싶어, 일반 아동발달센터보다 소아정신과를 선택해서 찾아왔는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처방전을 손에 들고 어떻하지, 어떻하지를 망설이다 처방전을 다시 돌려주고 의사선생님 의견대로 약은 조금 더 지켜보고 일단 놀이치료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약은 학교에 입학하고 적응하기 힘들 때 쓰는게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약을 먹이면 정말 아이의 마음이 편안해질까? 그렇다면 먹이는게 좋겠지만 아이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한데 약을 먹어서 일시적 효과만 본다면, 아 약을 먹으니 이젠 괜찮아졌구나 하고 내가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이번 기회도 놓쳐버린다면. 겁이 났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았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이날 집에 가는 차안에서 들리는 라디오에서 한 DJ이가 생일을 맞은 또다른 디제이에게 물었다. "사는게 어떠세요? 사는건!" 그러자 생일을 맞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를 듣고 심지어 그 노래를 부르기까지 한 DJ가 대답했다. "버거워요....." "오늘 생일인데요? 자! 노래한 곡 듣겠습니다. 인생은 즐거워!" 생일 당사자는 버겁다는데 인생을 즐겁다는 노래는 참 아이러니했다.




사는건 뭘까, 아이의 종합심리검사 보고서에 임상심리사는 아이의 놀이치료뿐 아니라 부부치료도 권했다. 남편은 검사를 방어적으로 해서 자신을 한껏 괜찮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높은 수준의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을거라고 평하였고, 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며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상심리사는 부부치료를 권한 것 같은데 부부치료 비용을 듣고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기로 했다. 아이 놀이치료 비용 8만원, 우리 부부치료 비용 12만원 일주일에 20만원, 한달에 80만원이란 돈을 상담에 쓰기엔 우린 대강 사는편이 나았다. 


아이 놀이치료 비용만 결재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길. 오늘 생일이라던 디제이. '나도 버거운데 웃고 있는 당신도 버겁구나.' 나와 마음이 같다고 생각해서 일까. 그 DJ가 옆에 있는 남편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전 01화 어느날 갑자기, 분리불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