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사회 2편
포르노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체에 대한 물신적 시각이다. 어려운 말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간단히 말하자면 신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의미이다. 신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차등을 두고, 우열을 나누어 명품과 싸구려 신체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상품의 다양성은 모든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최상위 상품들 아래에 무수히 다양한 모방품을 두는 것으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신체를 상품으로 대하는 것은 유행에 따라 변하는 미의 기준의 무수한 모방을 신체개조를 통해 이루어내는 것에 이르렀다. 그것이 수술이든 시술이든 이미 신체는 그 상품성이 고유의 속성인 것과 같이 여겨진다.
원죄로 인해 그들은 신성한 옷을 빼앗기고 만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아담과 이브는 몸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곧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50쪽 -
미켈란젤로의 <원죄와 천국에서의 추방>은 원죄의 순간 직전과 이후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림의 왼편에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에 손을 대는 아담과 이브가 보인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천사에 의해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가 보인다. 이 그림은 인과관계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원죄로 인해 아담과 이브는 천국에서의 거주권을 잃고, 유한의 생과 죽음을 얻었으며, 동시에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이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은 크라나흐의 <아담과 이브>에서 보듯 자신의 성기를 가리는 '벌거벗음'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인용하듯 조르주 아감벤은 원죄 이전과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변화를 "은총의 옷"과 "빛의 옷"이라고 지적했다. 이 옷은 눈에 보이는 옷이 아닌 신체에 대한 관점의 옷이다.
아담과 이브는 천국에서 아이를 갖지 않았다. 그들의 성적 욕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혹은 욕망을 갖고 아이를 가질 정도의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원의 시간을 부여받은 그들에게 '생식'은 필수가 아니었다. 인간이 지상으로 추방된 후, 다시 말해 영생을 잃고 유한의 삶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우리는 개체의 생존과 종의 생존을 동시에 도모해야 했다. 임신과 육아는 개체의 생존에 때로는 심대한 위협을 초래한다. 하지만 개체의 노화는 다음 세대의 보호에 의해 생존을 담보받을 수도 있다. 종의 생존을 위해 '생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이성의 신체에 대한 욕망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의 생존을 위한 성욕은 개체의 생존을 위한 수면욕과 식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지배적 욕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무분별한 신체에 대한 욕망은 종의 생존이라는 거대한 목적에는 부합할지 모르나, 사회라는 틀에서의 생존에는 부적합하다. 개체 간의 생식투쟁은 독점적 소유욕에 의해 '알파 메일'의 등장을 초래한다. 각 개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코나투스(conatus)를 넘어 종 내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를 행사한다. 결국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국가를 만들 듯, 공동체는 질서의 유지를 위해 도덕과 법을 마련했다. 프란츠 폰 슈툭(Franz von Stuck, 1863-1928)은 <원죄>에서 뱀에게 둘러싸인 매혹적인 포즈의 여성을 등장시켰다. 상징주의로 분류되는 이 그림에서 밝게 드러난 여인의 젖가슴과 에로틱한 육체는 유혹과 위험을 상징하는 뱀과 어둠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얼굴과 대비된다. 뱀과 여인은 팜므 파탈(femme fatal), 즉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유혹을 의미하고 그 결과는 그녀 뒤로 보이는 불꽃이 이글거리는 지옥일 따름이다.
벤야민이 아름다움의 대척점에 놓은 숭고함에는 어떤 전시가치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로 인해 피조물의 숭고함은 파괴된다. 숭고함은 제의가치를 생산한다. 포르노적으로 자기를 전시하며 맞은편 상대를 향해 "교태를 부리는" 얼굴만큼 숭고함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 <투명사회>, 한병철, 50-51쪽 -
작가가 지적하듯 전시화된 신체는 맞은편 상대에게 단 하나의 목적, 투명한 의도를 드러낼 뿐이다. 그것은 유혹 그 자체이며 신체 자체가 그 대상이 된다. 타인의 신체를 취했는지 아닌지, 있음과 없음의 단순한 이분법적 기록으로서의 신체는 전리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체에 깃든 정신과 신체와 함께 한 역사는 '살의 외설성'의 대척점으로 기능한다. 슈툭의 <원죄>는 상징과 신화를 통해 신체의 제의적 기능, 즉 사랑과 욕망의 변증법을 통해 '살의 외설성'에 대한 경고를 울리며, 우리를 신체를 인간 조건과 욕망, 죄의식에 대한 복잡한 성찰로 이끈다.
한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살의 외설성' 혹은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때론 과장하여 드러낸다. 신체는 인간들의 욕망의 투쟁의 장이 되어 폭력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신매매, 장기밀매 등은 인간의 신체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을 담는 그릇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베이컨은 제의적 기능을 상실한 신체가 인간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말한다.
저는 도축장과 고기에 관한 사진들에 늘 깊은 감명을 받았고, 제게는 그 사진들이 십자가 처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도살되기 직전에 끌려가는 동물들의 모습과 죽음의 냄새를 담은 놀라운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사진들을 보면 동물들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사진들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에는 십자가 처형과 아주, 아주 가까운 것 같습니다. 종교인, 기독교인에게 십자가 처형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무신론자에게 십자가 처형은 그저 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 프랜시스 베이컨 -
정육점 코너에는 웃는 닭, 돼지, 소가 우리를 반긴다. 신선한 자신의 신체를 광고하며 그것을 죄의식 없이 즐겨주길 바란다. 이곳에 동물의 존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존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죽은 동물에 대한 죄의식에 눈감게 만드는 방식은 웃은 동물의 모습이다. 베이컨은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신체 훼손의 장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살의 외설성'과 '존엄의 부재'를 강조한다.
영화 <옥자>에서 봉준호 감독 역시 생명을 자본과 산업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비판한다. 감독은 육식에 대한 반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 공장식 도축을 비판한다. 무수히 양산된 도축용 동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여는 것은 옥자를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가장 완벽한 신체는 매끈하고 흉터 없는 새것 같은 피부가 아닌 자신의 삶이 기록된 '이름을 가진 신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체들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도 가려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