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사회 4편
작가는 아감벤을 비판하며 에로틱한 것과 포르노적인 것의 본질적 차이를 지적한다.
벌거벗은 것의 직접적 전시는 에로틱하지 않다. 몸에서 에로틱한 부분은 바로 "옷의 벌어진 자리" "두 개의 가장자리 사이." 이를테면 장갑과 소매 사이에서 "빛나는" "피부"다. 에로틱한 긴장은 벌거벗은 몸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때가 아니라 "빛의 점멸을 연출"할 때 생겨난다. - <투명사회>, 한병철, 55쪽
우리는 흔히 '개념(cencept)'은 중심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경계(border)'에서 규정된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에서 개념이 우선하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세계에 드리운 그림자를 관찰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지성을 통해서만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이데아를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기론은 그리스어로 anamnesis라고 하고 여기서 기억을 뜻하는 mneme에서 파생되었다. 이것을 라틴어로 쓰면 reminiscentia로 이 단어는 다시를 뜻하는 re- 에 기억을 뜻하는 memoria를 합성어이다. 플라톤의 인식론과 영혼론에서 모든 지식은 영원불멸의 영혼에 존재하지만 출생과 동시에 잊힌다. 불완전한 육체에 갇힌 영혼은 지성의 활동을 통해 잊어버린 이데아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육체는 감각이라는 불확실한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므로 늘 오류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림자 세계의 대상에 흩어진 원형의 조각들을 이성의 작용을 통해 이어 붙여 "원래의 지식", 참된 앎(episteme)을 회복하는 것이 플라톤에게는 철학의 존재 이유이다. 이 "원래의 지식"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하고 명백한 진리로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것(haecce)"에 속한다.
... 그런 한에서 벌거벗음의 정리는 단순하다. Haecce(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것!" 반면 에로틱한 것의 정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로틱한 것은 "haecce!"에서 빠져나간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것'이라는, 비밀이 없는 명백성은 포르노적이다. 에로틱한 것에는 지식적인 명백성이 결여되어 있다. - <투명사회>, 한병철, 56쪽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그림자 세계, 즉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곳에서 이데아의 개념은 공허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는 항상 진화의 상태에 놓여있다. 하나의 종은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종의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 종의 생존이 목적일 때 생존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외부환경에 대한 적응이 종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에 앞선다. 화석을 분석해 보더라도 불과 몇백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동일한 생명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생존을 위해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행한다. 생명체에게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 즉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은 이미 멸종된 종 밖에 없다. 멸종된 생명체는 연구에 있어서 명백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는 지금도 에로틱한 교배를 통해 모호함으로 나아간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모호함은 진화와 다르지 않다.
포르노적인 몸은 매끄럽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는다. 중단은 양가성과 중의성을 낳는다. 바로 이 같은 의미의 불명확성에 에로티즘이 있다. 더 나아가 에로틱한 것은 비밀과 은둔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투명성의 에로티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 <투명사회>, 한병철, 55-56쪽
이전 편에 설명한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의 작품과 같은 모더니즘 초기의 추상회화는 선명하고 분명한 경계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어떠한 모호함이나 불명확함이 없다.
몬드리안은 나무를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 하지 않는다. 새 잎이 나고, 잎이 지고, 다시 새 잎이 나는 모든 변화의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근원적 요소를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시간의 나무를 '추상'을 통해 한 화면에 재구성했다. 그의 논리 안에서 이것이 나무라는 것은 차가운 논리적 명백함을 유지한다. 그는 '차가운 추상'을 통해 질서, 조화, 보편적인 아름다움, 순수한 형태의 진리를 탐구했다. 보편적 진리는 모든 인간에게 명백한 것, 즉 개인의 경험이 아닌 모든 인간의 공통된 경험을 추구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몬드리안이 특정 대상을 해체하는 과정을 그림에 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처음부터 형체를 알 수 없는 색면(color field)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이는 어떠한 구체적인 사물이나 세계의 재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로스코는 그림의 시각적 동기화 기능보다 사유의 자극을 유도한다.
"가장 흥미로운 그림은 보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을 더 많이 표현하는 그림"이다. "[형태는] 어떤 특정한 시각적 경험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 안에서 유기체의 원리와 열정을 인식하게 된다." - 마크 로스코 -
로스코의 예술은 어떠한 대상의 재현이 아닌 특정한 감정(비극, 황홀, 숭고 등)이나 영적인 경험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관찰자가 '무엇을 느끼게 하는가'에 집중한다. 관찰자가 느끼는 것은 명백한 선과 색이 아닌 모호하고 불명확한 색과 선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추상적인 감정이나 정신적인 상태이다. 몬드리안이 '세계를 바라보는 추상적인 방식'을 제시한 것이라면, 로스코는 '세계와는 별개의, 순수하게 추상적인 새로운 경험의 창조'를 보여준다.
나는 마음속에서 창조된 세계와 그 바깥에서 신이 창조한 세계가 동등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익숙한 사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 실수를 했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너무 오래되어 쓸모없거나 어쩌면 애초에 의도되지 않았던 어떤 행위를 위해 그것들의 외형을 훼손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초현실주의자들과 추상미술가들과 논쟁하는 것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를 논쟁하는 것과 같다. 내 뿌리의 필연성과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나의 반대를 고집한다. 나는 그들과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이자, 그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 마크 로스코 -
로스코 혹은 관찰자가 경험하는 새로운 경험은 외부의 세계와 별개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관찰자 개별에게 동일한 경험을 전달하지 않고, 관찰자마다 느끼는 차이를 의도하여 그의 개인적 경험을 자극한다. 하지만 관찰자들은 각자가 느낀 모호한 감정들이 시작되는 로스코의 작품을 통해 연결되고, 독립적 실체들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감정이나 숭고한 정신상태를 공유할 수 있다.
그림은 예민한 관찰자의 눈에 비친 동질감으로 살아가고, 확장되고 생동감을 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림은 죽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림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위험하고 무감각한 행위입니다. 속물들의 시선과, 그 고통을 만인에게 퍼뜨리려는 무력한 자들의 잔혹함으로 인해 그림이 얼마나 자주 영구적으로 손상되어야만 하는지! - 마크 로스코 -
로스코의 예술은 모호함을 통해 개별성과 보편성 모두에 접근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인적 경험과 보편적 경험이 만나는 지점, 로스코 예술은 그 지점을 경험하는 장소 그 자체이다.
회화는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회화는 경험 그 자체입니다. - 마크 로스코, 1959년 라이프(LIFE)지와의 인터뷰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