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사회 1편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축에서는 육체를 영혼보다 소홀히 취급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우리가 이데아를 떠올리는 것을 방해하는 감각은 신체적 반응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정신적 작용을 통해서만 본질적인 것에 다다를 수 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선험성을 부정하고 육체를 통해 얻은 경험적 정보만이 우리의 인식을 구성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마르크스와 같은 유물론자들은 나아가 정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들보다 물질적인 조건들이 우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는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내세우는 대자적 존재(pour soi)의 두 가지 특성인 사실성(facticity)과 초월성(transcendence)에 주목한다. 사실성은 인간 존재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기원, 국가, 신체, 시대와 같은 것이며, 초월성은 이러한 조건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자적 존재(en soi)인 신과 달리 대자적 존재인 인간은 "조건" 위에서 실존한다. 부모에 의해 태어나며, 국가 속에서 자라고, 특정한 시대에 속할 뿐 아니라 신체라는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러한 조건 속에서만 살지는 않는다.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그들을 거역하기도 하며, 국적을 바꾸기도 하고, 시대를 초월한 삶을 살 수도 있다. 또한 신체적 조건과 한계보다 정신과 영적인 활동에 중점을 두어 살아갈 수 있다. 사르트르는 사실성과 초월성이라는 두 가지 구조적 틀을 가진 대자적 존재인 인간은 어느 것에 무게를 두더라도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와 그것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몸은 단순한 살의 사실성으로 축소될 때 외설이 된다. 지시하는 것이 없는 몸, 방향이 없는 몸, 행동하지 않고 상황 속에 놓이지 않은 몸은 외설적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63쪽 -
작가는 사르트르의 '사실성'에 기반하여 몸의 외설성을 비판한다. 투명성은 우리를 몸의 표면에 주목하게 한다. 변하지 않는 몸의 표면은 투명사회에서의 덕목이다. 동안의 팽팽한 피부는 불변의 몸을 상징하고, 이러한 몸은 우리에게 시간이 상실된 이미지와 같이 고정된 값으로 존재한다. 정지된 대상, 즉 운동하지 않는 몸은 하나의 표상이 되어 벡터(vector)가 아닌 스칼라(scalar)로 측정된다. 스칼라는 벡터와 달리 방향성 없이 크기만 가지는 물리량이다.
외설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론은 사회의 몸, 그리고 그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과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거기에서 어떤 서사도, 어떤 방향도,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순간 사회의 몸은 외설적으로 되며, 이때 과다와 과잉은 비대화, 대량화, 마구잡이 증식으로 나타난다. 목적도 형식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사회의 몸은 외설적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63쪽 -
'목적도 형식도 없이' 존재하는 몸은 허무주의의 몸이다. 니체와 사르트르가 공유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기원부터 정해진 목적을 대상으로 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목적은 운명론적이며,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신이 주신 '소명'이 그것이다. 실존주의적 태도는 우리가 온 곳에서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실존적 상태를 '내던져진(dt. geworfen)'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우연적 탄생을 통해 세상에 의미 없이 태어난 것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의미가 상실된 허무한 존재적 상태를 견디기 위해 가상의 목적을 만들고 그것을 맹종하기 위해 '신'을 창조했다는 것이 니체의 적나라한 비판이다. 그리고 실존주의자들은 의미 없이 세상에 태어나 죽음이라는 '무'로 돌아가는 것을 '부조리(absurdité)'라고 말했다. 성인이 되는 과정은 '부조리'의 허무함에서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삶에서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나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이다.
까뮈는 <시지프 신화: 부조리에 관한 에세이>(1942)에서 '부조리'의 상태를 시시포스가 받는 형벌에 비유했다.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시포스 조차도 '무의미한' 형벌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까뮈는 부조리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것이 시시포스의 숨겨진 기쁨이다. 그의 운명은 그에게 속한다. 그의 바위는 그의 일이다. [...] 부조리한 인간은 그렇다고 말하고, 그의 노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만약 개인적인 운명이 있다면, 더 나은 운명은 없다. 적어도 그에게 치명적이고 경멸스러운 운명은 하나뿐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자신의 날들의 주인임을 안다. 인간이 자신의 삶으로 눈을 돌리는 바로 이 순간, 시시포스는 자신의 돌로 돌아가, 자신의 운명이 될 일련의 단절된 행위들이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기억의 시선 아래 하나로 합쳐졌다가 곧 죽음으로 봉인되었다고 여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의 완전한 인간적 기원을 확신하는, 보고 싶어 하고 밤의 끝이 없음을 아는 맹인인 그는 항상 움직인다. 돌은 여전히 굴러간다. [...] 이제 주인을 알지 못하는 이 우주는 그에게 황량하거나 가치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모든 알갱이, 이 밤으로 뒤덮인 산에서 번쩍이는 모든 광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정상을 향한 투쟁은 인간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우리는 시시포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 <시지프 신화>中, 알베르 까뮈, 1942 -
니체 역시 허무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까뮈의 시시포스의 기쁨을 연상시키는 '아모르파티(amor fati)'를 말했고, 위버멘쉬(Übermensch)를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를 통해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자라고 이해했다.
이탈리아의 예술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1939년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에서 사르트르와 그의 파트너인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난다. 이 만남 후 사르트르는 1943년에 <존재와 무: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에세이>를 출판하게 되고, 이 책에 이미 자코메티의 아이디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코메티는 <손가락을 든 사람(L'homme au doigt)>에서 살덩이(flesh)를 제거한 뼈대의 몸을 제시한다. 전통적 의미의 '신체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발견할 수 없다. 육체성이 거의 제거된 이 앙상한 몸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증폭된 인간 존재의 나약함, 고독, 불안감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앙상한 몸은 그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것과 같이 '지시성'을 갖는다. 무의미한 존재로 던져진 인간이 실존적 고독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드는 행위는 스스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안전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선택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려는 인간의 의지만이 '자유롭도록 선고된' 인간의 실존적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