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사회 2편
작가는 하이데거가 즐겨 쓰는 유사어를 이용한 의미의 구분을 따른다. 독일어의 경험'Erfahrung'과 체험 'Erlebnis'은 일상적으로 독일에서 엄밀하게 나뉘는 단어는 아니다. 작가는 두 단어의 어근 fahren과 leben에 주목하여 의미를 구분한 듯한데, fahren은 영어의 drive에 해당하는 주도적 방향성의 설정과 추진을 의미하며, leben은 중립적 의미의 '살다'라는 뜻을 가진다.
...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그런 점에서 경험 Erfahrung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체험 Erlebnis과 다르다. - <투명사회>, 한병철, 65쪽 -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소위 신세계로 번역되는 <Mundus Novus>라는 여행서를 집필한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Amerigo: Die Geschichte eines historischen Irrtums(아메리고: 역사적 오류의 이야기, 1944)에서 츠바이크는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발견자인지의 여부와 그에 대한 오류의 역사를 밝힌다.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은 독일의 지도제작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와 마티아스 링만 (Martin Waldseemüller and Matthias Ringmann)이 1507년 베스푸치가 최초의 발견자라는 언급을 하며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듯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유럽인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ombus, 1451-1506)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경험'과 '체험'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츠바이크는 <아메리고: 역사적 오류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메리카, 즉 신대륙으로 최초로 인식했습니다. 이 하나의 업적은 그의 삶, 그의 이름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 그 자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행위의 인식과 그 결과만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록하고 설명하는 자가 그것을 창조한 자보다 후세에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역사 속 예측 불가능한 힘의 작용 속에서 가장 작은 충동이 가장 엄청난 결과를 촉발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정의를 기대하는 사람은 역사가 기꺼이 주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역사는 종종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에게 공적과 불멸을 수여하고, 가장 훌륭하고 용감하며 현명한 자들을 이름 없는 어둠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 <아메리고: 역사적 오류의 이야기>中, 슈테판 츠바이크, 1944 -
실제로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1492년보다 5년 뒤인 1497년 아메리카로의 첫 여행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를 최초의 발견자라고 오해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을 새로운 땅이라고 인식하고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네 차례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 흔적으로 남은 아메리카 원주인의 영어 표현이 인디언이고 카리브해의 섬들에 대한 명칭이 '서인도 제도'이다. 지도 위의 인도는 하나뿐이지만 명칭으로서의 인도는 '동인도'와 '서인도'로 나뉜다. 만약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신항로가 아닌 신대륙이며, 그곳의 원주민이 유럽인과의 최초로 조우라는 특별한 의미를 알았다면 그들을 탄압하거나 학살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츠바이크가 말하듯 우리는 한 인물의 업적을 그들의 행위 자체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행위 자체보다는 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다. 베스푸치가 콜럼버스보다 뛰어나지 않은 항해자여도, 더 늦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어도 상관없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그것이 새로운 대륙임을 인식했고, 그 대륙이 가진 새로운 가치를 일깨운 사람이다. 새로운 항로와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지도의 지도에 그 결과물을 끼워 넣었다.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관찰 사이에 생긴 오류는 기존 지식의 수정이 아닌 새로운 관찰의 보정을 통해 해결했다. 하지만 수많은 새로운 발견은 기존의 지식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단순한 곰팡이에 불과했던 것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 경(Sir Alexander Fleming, 1881-1955)의 업적은 푸른곰팡이를 최초로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푸른곰팡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알렉산더 플레밍은 결국 니체가 말하는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를 이루어 낸 인물들로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게 아니라 기존의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내었다.
창조가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기존의 대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뒤샹이 '레디 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을 통해 변기에 '샘'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혁명적 사고의 전환을 통해 증명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다르게 생각하기(penser autrement)'을 '자기에의 배려(le souci de soi)'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성장의 과정은 이미 헤겔의 변증법(dialektik)의 정, 반, 합이라는 도식을 통해 자기부정을 통한 변화로 설명된 바 있다.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가 1908년에 발표한 동화 <파랑새(L'oiseau bleu)>는 틸틸과 미틸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숲 속, 공동묘지, 행복의 정원, 미래의 나라를 차례로 탐험해 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파랑새를 온전히 잡지 못한다. 파랑새를 찾았더라도 이미 죽어있거나 색이 변해버리거나 훌쩍 날아가 버린다. 이 모든 꿈에서 깨어난 남매는 1년 동안의 여행이 하룻밤의 꿈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그들이 찾던 파랑새였음을 알게 된다. 이 동화에서 마테를링크는 우리에게 행복의 진정한 속성에 대해 전한다. 행복은 경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낯선 것과의 조우가 아닌 익숙한 환경에서 발견하는 낯선 자신의 관점이 바로 행복의 비밀이다. 그리고 낯선 자신에게 익숙해져 버리는 순간 또다시 낯선 자신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행복의 휘발성은 낯섦이 익숙해지는 과정이며, 우리는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에서 행복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예민한 관찰력만이 우리를 '체험'이 아닌 '경험'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경험'을 겪은 이들은 "동일한 것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 놈이나 저 놈이다 다 똑같아!",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너는 별거 있을 것 같니?"등의 무가치한 말들을 통하지 않는다. 새로운 도전은 그들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