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사회 3편
작가는 라틴어 procedere (전진하다)에 대한 두 가지 파생어를 이용하여 투명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프로세서는 서사성의 결핍으로 인해 행렬(Prozession)과 구별된다. 행렬은 서사적 사건이다. 행렬은 프로세서와 달리 강력한 방향성을 지닌다. 따라서 행렬은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행렬은 서사성을 지니는 까닭에 고유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반면 프로세서의 전진에서는 어떤 서사성도 찾아볼 수 없다. 프로세서의 작동에는 어떤 이미지도, 어떤 장면도 없다. 행렬과 반대로 프로세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erzählen 않는다. 프로세서는 오직 셈할 zählen 뿐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65-66쪽 -
프로세서(Prozessor)는 계산을 기반으로 한 명백한 것의 결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프로세서는 ‘성능’으로 평가될 수 있다. 객관적 성능평가는 우열을 가리게 해주고, 이전 버전과 이후 버전 사이에는 명백한 우위가 존재한다. 반면 서사는 우열을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행렬의 과정에는 앞과 뒤 사이의 우열관계가 없다. 앞과 뒤의 연결을 통해 이야기의 구조가 드러나고, 이 둘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이다. 어떠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더라도 완벽하게 빈틈없는 전개로 완결될 수 없다. 이후에 등장하는 장면이 시간적으로 끼어들 수 있고, 이에 따라 이야기는 수정이 아닌 풍성함으로 나아간다. 행렬은 시간적인 단순 진행이 아니라,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잠시의 일탈은 언제나 허용된다.
수학의 계산식이 가득한 프로세서에는 참과 오류의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올바른 해에 도달한 수식은 참으로 인정받고, 과정상에 단 하나의 오류라도 발생한다면 참에 도달할 수 없다. 반면 서사에는 참과 거짓 사이에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재위기간 1503-13)의 의뢰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계획한다. 우리에게 천지창조로 알려진 아담과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닿기 직전의 장면은 사실상 천지창조(Genesis)의 일부인 <아담의 창조>이다. 이야기로 기록된 성경의 내용이 예술가의 시각화 과정을 통해 '장면'으로 창조된다. 이때 우리는 특정 장면이 정지된 시간이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한다. 이 '장면'은 흐르는 시간의 얼어붙은 박제가 아니다. 관찰자는 '장면'이 발생하기 전과 후를 이미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장면은 동일하지 않다. 누군가는 초점 잃은 아담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손가락이 맞닿자마자 꿈틀거리는 아담의 육체를 떠올릴 수도 있다. 각자의 상상력에 '장면'의 흐름, 즉 이야기의 '행렬'은 열려있다.
프로세스는 안무와 미장센을 필요로 하는 서사적 진행과 구별된다. 기능적 특성을 지닌 프로세스는 단지 조종과 관리의 대상일 뿐이다. 모든 것이 프로세스가 된 사회, 그리하여 "더 이상 아무런 장면도 없고 모든 것이 철저히 투명해진" 사회는 외설적이다. -<투명사회>, 한병철, 66-67쪽 -
그리스의 여신인 헤라는 로마에서는 유노로 불린다. 그녀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로마신으로는 유피테르)의 부인으로 남편에 대한 감시의 역할을 아르고스에게 맡긴다. 온몸에 백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는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 의미로 아르고스 판옵테스(Argos Panoptes)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고대인들에게 '백'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백개의 손을 가진 헤카톤케이레스(Hekatonkheires)의 이름에 포함된 hekaton이 숫자 100을 의미하고, 제우스는 무수한 손으로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는 이 티탄족의 신에게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에서 패배한 티탄족 신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두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긴다. 아르고스가 가진 완전한 감시의 눈이 현대 사회에 구현된다면 우리는 투명성을 구현하고 완벽한 안전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영화 배트맨의 시리즈 중 하나인 다크나이트에서 주인공 브루스 웨인은 루시우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고수파 송수신기를 만든다. 고담 시티의 모든 전파에서 송수신되는 정보를 한 장소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이다. 이 기계를 통해 브루스 웨인은 신출귀몰한 빌런 조커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이 기술이 한 사람이 갖기에는 너무 큰 힘이라고 두려워하고 브루스 웨인은 이 기술을 1회성으로 사용하고 폐기할 수 있는 명령어를 알려준다. 모든 악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초래하는 문제는 해결가능한지 불가능한지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쫓는 것은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용자의 시선일 뿐, 그것이 악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분별'이 아니다.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1955-)는 엄청난 해상도과 거대한 크기의 사진을 통해 무의미한 감시의 시선과 해석 없는 관점의 허구를 보여준다. 관찰자는 그의 작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선명함을 느끼게 된다. 어느 한 곳 초점이 흐린 곳이 없으며, 현미경으로 모든 디테일을 관찰한 듯 보인다. 우리의 눈은 한 번에 한 곳에만 머무를 수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시야의 가장자리나 인식의 바깥에 자리하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는 구르스키가 보여주는 선명함으로 모든 사물이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듯 하지만 관찰자와 대상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완벽한 해상도의 투명성을 허구로 만든다. 구르스키가 보여주는 투명함은 역설적으로 그 방대함이 주는 총제적 인식의 불가능성, 즉 사실상의 불투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자는 관광객이 아니다. 관광객은 현재에, 지금 여기에 체류하고 있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길 위에 있는 자가 아니다. 그에게 길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길은 볼거리가 아니다. 관광객의 길은 길의 풍부한 의미와 서사성을 알지 못한다. 길은 서사적 서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텅 빈 통로로 전락한다. 이와 같은 의미론적 궁핍화, 공간적-시간적 서사성의 결핍은 외설적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67-68쪽 -
브루스 웨인이 만든 감시망과 헤라가 아르고스를 통해 구축한 완전한 감시는 특정한 목적에만 온전히 작동할 뿐, 그 목적이 사라지는 순간 분별없는 시선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 작가 한병철은 분별 잃은 시선을 가진 자를 순례자에 대비하여 관광객이라 부른다. 구르스키의 작품에는 '누군가'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텅 빈 사진은 사물이 아닌 제품들로 가득 차있다. 제품들은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도 같지 않고 나열될 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불러주지 않는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사회에서 분별을 상실한 시선의 인간은 타인에 대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호부재'의 상태에 있다.
시인 김춘수는 순례자로서의 인간의 조건을 '호명', 즉 '관계를 맺는 행위'라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투명사회>에서 작가는 이러한 관계의 상실을 비판하려고 한다. 관계의 상실은 각 개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듯한 착시로 나타나지만, 사실상 관계가 상실된 정체성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손안에 있음(Zuhandenheit)'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 근본적인 존재방식은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