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사회 5편
한병철은 모든 이미지가 부정성이 결여된 투명성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작가는 "사색적 머무름"을 가능케 하는 이미지와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이미지로 나누어 이해한다. 그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의 <밝은 방>에서 '푼크툼(punctum)'과 '스투디움(studium)'의 개념을 이용하여 투명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사진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싫어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57쪽
스투디움(studium)은 라틴어 studere(노력하다, 헌신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스투디움은 지적인 열의와 노력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문화적, 지적 정보의 전달을 의미한다. 반면 푼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침술을 뜻하는 acupuncture는 라틴어의 바늘(acus)과 찌름(punctura)의 합성어이다. 바르트는 스투디움적인 수용을 "현명하고, 게으르고, 부드럽다"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지적인 과정을 통한 수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항상 코드화"되어 있다. 기본 원칙을 배우고 익히면 누구나 같은 읽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관습적이고 예측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사진가가 대상을 포착하고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한 것은 회화에서 화가가 화면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아는 사람들끼리 통용되는 기호들을 숨겨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진에는 그림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화가의 온전한 의도로 구성된 회화와는 달리 사진에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무언가가 대상의 주변을 채우고 있거나 혹은 화면 이면에 존재하는 직접적 대상이 존재한다. 푼크툼은 이러한 우연적 요소가 관찰자의 강렬한 개인적인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작용을 말한다.
오비디우스(Ovid, 기원전 43년 - 기원후 17년)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is)에 따르면 아폴론이 피톤을 활로 제압하고 그 시체 위에 델포이 신전을 세운 후 에로스를 조롱한다. 최고의 무기인 활로 최강의 괴물을 사냥한 아폴론은 숨겨진 사랑의 불꽃이나 쏘아 대는데 활을 사용하는 에로스의 신격을 얕잡아 본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에로스는 두 개의 화살을 준비한다. 사랑을 들끓게 만드는 날카로운 황금빛 화살로 아폴론을, 사랑을 흩뜨려 놓는 뭉툭한 납화살로 다프네를 꿰뚫는다. 사랑을 열망에 사로잡힌 아폴론은 다프네를 쫓아가지만 다프네는 그를 피해 도망가다 스스로 월계수로 변한다. 나무로 변한 다프네라도 소유하고 싶었던 아폴론은 월계수의 잎으로 화환을, 월계수의 나무로 자신의 악기인 리라와 무기인 화살통을 만들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뺏겼으나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괴로움에 아폴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보다 더 날카로운 화살이 내 자유로운 가슴을 다치게 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떤 약초로도 치유될 수 없다...
푼크툼은 에로스의 화살과 같이 관찰자의 마음을 꿰뚫는다. 비자발적이고 즉각적이며 피할 수 없는 주관적 상처는 예상치 못한 우연한 사건에 의해 촉발된다. 심지어 궁술뿐 아니라 태양, 예술, 예언, 의술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조차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우연적 사건이며 이것이 세계와 삶의 전체를 이룬다.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amor fati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총명한가’ 中, 니체 –
니체는 '우연'이 '필연'보다 오래된 가문이라고 말하며 전체성과 목적론적 세계관을 비판한다. 우리의 예측은 "좁은 의식"이며, 우리가 필연이라고 믿는 것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종교는 불안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회피성을 그 뿌리로 삼는다는 것이 니체의 비판이며, 그에 따르면 세계의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데서 삶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혼돈(chaos)'은 '질서(cosmos)'의 부재가 아닌, 그것을 포함한 전체이다. 니체는 혼돈을 창조성과 자기 극복의 근원이라 여긴다. 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우연적인 것은 "혼란이 아닌 가능성"이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 역시 니체와 유사한 삶에 대한 관점을 지닌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알베르 까뮈 -
한병철이 투명사회에서 배제되는 '부정성'의 재평가를 재고하는 것과 같이 니체와 까뮈는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정성'을 말한다. 혼돈과 절망은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본질적인 관조를 가능하게 해 준다.
푼크툼은 "숙고적 태도"라고는 알지 못하는 소비적이고 탐식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많은 경우 푼크툼은 즉시 발현하기보다는 뒤에 가서야 머물러 회상하는 의식에 나타난다.... 내가 사진을 더 이상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 채 다시금 사진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투명사회>, 한병철, 60쪽 -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가 아니다. 대상이 나를 "꿰뚫음"이 그의 부재의 순간에 나에게 떠올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실체로서 드러날 때 비로소 깊이 있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의 부재를 해결하는 방식은 조바심과 집착이 아닌 내 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무수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의 화살에 비유하여 표현한다.
사람이 더 이상 사람 저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신의 활시위를 올릴 줄도 모르는 때가 오고 말 것이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는 아직 그러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5 中, 니체
니체는 우리가 화살을 맞는 수동적 상태에 놓이길 바라지 않는다. 수많은 대상에게 동경의 화살을 쏘고, 그곳으로 향하게 되는 의지를 갖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혼돈을 느끼며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기를 요구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포르노적 이미지가 아닌 매 순간 변화를 거듭하는 아름다운 '너'로 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