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읽기 #19

포르노사회 3편

by Homo ludens

[소멸인가, 새로움인가?]

전시에 대해 한병철이 비판적 시각을 갖는 한편 아감벤은 벌거벗음을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여긴다.

아감벤은 전시가 신학적 명령에서 해방된 저 벌거벗음을 드러낼 수 있는 탁월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 <투명사회>, 한병철, 52쪽 -

아감벤의 비판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포스트모던은 현상 이면의 숨겨진 진리를 발견하는 것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해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문화의 주체를 엘리트가 아닌 대중으로 인식하게 했다. '세속화(Profanisierung)'를 통해 이전 시대에 억압되어 있던 것들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시도는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낡은 체제의 전복(ancien régime)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감벤과 한병철의 태도는 나뉘는데, 아감벤은 제의적 가치가 사라진 순수한 전시적 가치가 새로움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이어오던 도상학(iconography)과 상징이 아방가르드(avantgarde) 미술에서 소멸되고 단순한 형태와 색채의 사용을 통한 모방하기 쉬운 미술이 등장하는 것은 아감벤에게는 예술의 소멸이 아닌 새로운 예술의 탄생이다. 인상주의자, 야수파, 입체파 등의 전위적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기존가치의 파괴자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아감벤의 말처럼 그들은 예술의 소멸시키는 자들이 아닌, 새로운 예술의 창조자들이었다.


한병철은 아감벤의 새로움의 창조에 대한 부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포르노 장치'라는 것은 창조적 발견을 모방하는 수많은 모방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모방 자체가 목적인 모방은 흉내내기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예술의 소멸이 아닌 자신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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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검은 사각형>, 카시미르 말레비치, 1912; 오른편: <러시아 춤의 리듬>, 테오 판 두스부르흐,1918

아방가르드에 등장하는 추상회화는 모방하기에 용이하다. 그들의 작품은 떠올리기에는 힘들고, 그려내기에는 간단하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과 '선언'이다. 누가 먼저 떠올리고, 떠벌리느냐가 중요하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작품이 납득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예술로 인정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다면 당대에는 새롭다고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기 위한 문제의식과 자신만의 해법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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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마르셀 뒤샹, 1912; 오른편: <샘>, 마르셀 뒤샹, 1917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신학적 명령'에서 벗어난 '벌거벗음'을 새로움으로 발전시켰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인상주의에서 시작된 표현의 단순화와 찰나의 포착에 누적된 시간을 더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인체에 대한 묘사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포착이 아닌 '움직임의 관념에 대한 시각적 인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1957년 뒤샹은 논문 <창조 행위>에서 자신이 벌거벗은 신체의 모방에는 관심이 없음을 고백한다.


저는 벌거벗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거부하고, 연속적인 하강 동작에서 스무 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정적인 자세만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 마르셀 뒤샹 -


신체에 대한 전통적인 미적 개념에서 해방된 뒤샹은 사물에까지 실험을 확장한다. 뒤샹은 예술품이 예술가가 한 땀 한 땀 조각하거나 그려내야 한다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기존에 판매되는 일상적 물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그 자체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레디메이드(ready-made)로 알려진 <샘>은 "예술가가 창조한 물건이 아니라, 예술가가 미적 편견 없이 선택한 일상적인 물건"이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될 때 관찰자의 호기심과 생각을 자극하는 효과를 기대한다. 심지어 작가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이름 대신 가명 R. Mutt를 사용하여, 창작자조차 지워버린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거부가 온전히 새로움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예술의 개념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Transfiguration_Raphael.jpg <그리스도의 변용>, 라파엘로, 1516-1520

이제 어느 누구든 뒤샹을 흉내 낼 수 있다. 예술가가 가진 명성과 그의 작품에 씌워진 아우라(Aura)는 사라졌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ie Kunstwerke im Zeitalter d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5)에서 예술작품이 가지는 전시가치(Ausstellungswer)와 제의가치(Kultwert)에 대해 설명한다. 르네상스 이후 종교성에 낮아짐에 따라 예술작품에 깃든 아우라 역시 점차 옅어진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음에도 멀리 있는 일회적 출현(einmalige Erscheinung der Ferne, so sie nah sein mag)"이라고 정의한다. 기독교적 해석으로 보자면 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편재성(omnipresence/ubiquitous)에도 특정 시기, 특정 공간에 발생하는 특수한 현현(epiphany)이 예수의 탄생이다. 삼위일체의 신이 변화하는 육체를 갖고 이 세상에 드러나는 육화(incarnation)는 신의 속성이 아주 특별하게 작용한 것이며,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성과 속>(1957)에서 이것을 '성스러움이 범속함의 세계에 나타나게 되는 성현(hierophany)'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특이점의 생성으로 역사는 창조의 순간으로 회귀할 수 없는 일방향성을 띠게 된다. 동시에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 예수는 가까이 있으나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신성 그 자체이므로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아우라'이다.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어 실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예수를 무한히 먼 곳에 있는 듯한 공간적 연출을 시도했다. 동시에 아랫부분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과 손짓을 통해 무한한 거리 속에서의 접근가능성을 유지하며 '아우라'를 시각화한다.


한병철은 아감벤이 긍정하는 '순수한 전시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복제시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성숙한 모방 속에서 상실되는 '자신'(Selbst)을 지키고, 성숙한 영혼을 갖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화의 이미지는 눈에 띄지 않는 편재하는 악마적 수호자여야 하며, 그 보살핌 아래 젊은 영혼은 성숙해지고 그 징조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투쟁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 - <비극의 탄생>, 프리드리히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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