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사회 2편
투명사회의 친밀성은 나와 유사한 타인만을 허용하는 동일성의 지옥, 즉 배타적 공동성을 특징으로 한다. 유사한 사고와 유사한 얼굴은 내면과 외면의 투명한 일치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대중이 그토록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진정성"은 철저히 내면의 자신을 외면에 드러나도록 강요하고, 그것이 가감 없이 드러났을 때 비로소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 동시에 그의 내면이 온전히 노출될 때 그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고, 그의 유용성은 소멸된다.
개인 person(라틴어 persona)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다. 가면은 가면을 통과하여 울려오는 per-sonare 목소리에 성격, 즉 형식과 형상을 부여한다. 드러내고 노출하는 투명사회는 모든 형태의 가면, 모든 형태의 가상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 <투명사회>, 한병철, 75쪽 -
현대 심리학에서는 개인이 상황에 맞는 여러 페르소나를 갖도록 권한다. 억눌린 개성은 풍선효과와 같이 어떤 형식으로 표출될지 모른다. 스스로를 다양한 상황에 놓고 다양한 역할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을 억압으로부터 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위인전과 같이 한 개인의 일생을 하나의 관점으로 조망하여 일관성 있게 묘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흠결 없는’ 인간, ‘하나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인간은 오히려 의심해봐야 할 대상일 수 있다. 스스로를 ‘메시아’라 칭하는 수많은 가짜 선지자들은 그들이 갖은 권력만큼 큰 해악을 동반한다. 실제로 수많은 성인들은 자신의 과오와 방황을 통해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다. 초기 교회의 성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숙고하는 삶(vita contemplativa)과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의 조화를 강조했다. 올바른 행동은 같은 행동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의 반복을 통해 이를 수 있고, 새로운 시도는 과거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반성적 숙고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에 대한 긍정은 경로 하나하나의 무결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오를 반성적으로 수정하는 용기와 결단력을 의미한다. 자신의 과오를 하나의 가면(persona) 뒤에 숨겨놓고, 깊이 없는 가면의 투명성으로 치장하는 것은 타인 혹은 사회의 기준에 맞는 가상의 '진정성'을 내면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친밀성은 숙고와 반성의 공간을 부재하게 만들어 자기 객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밀착은 니체가 지적하는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가 결여되어 자기 자신을 제외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는 자기 인식이 철저히 결여된 존재다. 과도한 자기애를 가진 인물로 알려진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타인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은 그가 받는 관심과 사랑의 이유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탁에 따라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자라온 그가 처음으로 물에 비친 자신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환영에 눈을 뻗는다. 손을 대면 일렁이는 물결에 사라져 버리는 자신의 모습에 슬퍼하며 몸을 던진다. 자신과의 거리를 갖지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과거과 현재의 자신이 동일하다고 느끼는 인간은 반성과 숙고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공허와 부재'의 공간이 결여되어 있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 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투명사회>, 한병철, 77쪽 -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만남은 꽤나 흥미로운 사건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나르키소스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타인의 말을 뒤따라 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은 에코는 모두 자기 인식의 두 가지 결여 상태를 보여준다. 나르키소스와는 달리 에코는 자기가 완전히 상실되어 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에게 조차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없다.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나르키소스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에코의 만남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에코는 산속에서 형체를 잃고 타인의 목소리를 되돌려줄 뿐이며, 나르키소스는 자기에 대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니체는 위대한 인간인 위버멘쉬(Übermensch)에 이르는 방법으로 자기 극복(Selbstüberwindung)을 제시한다. 자기 극복은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을 뚫고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공허와 부재에서 허덕이는 허무 속에서 적극적 태도로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것, 그것이 위버멘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