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읽기 #28

정보사회 1편

by Homo ludens

[서사적 세계와 인식적 세계]

<친밀사회>에서 작가는 '진정성'의 허구성에 대해 지적했다. 페르소나는 투명성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진정성'의 압박으로부터 우리의 내면을 지켜주는 방패막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모두가 동일한 기준을 갖는 미래는 <멋진 신세계>, <1984> 등의 작품에서 이미 그려진 바 있다. 페르소나를 벗겨낸 투명사회에서는 모두가 획일화된 삶의 형태를 띠며, 내면이 비어버린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소마'와 같은 약물 없이는 공동체의 안녕을 기대할 수 없다. 작가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재해석함으로써 '진정성'이라는 허구의 기둥 없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연극적 세계관을 설명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얀 산레담, 1604

플라톤의 동굴 속은 모든 것이 가상인 세계이다. 불빛은 가상의 태양이며 그림자는 가상의 신체이고 동굴에서 들리는 소리는 공명을 통해 증폭된 가상의 소리이다. 플라톤의 가정에 따르면 죄수들은 서로를 볼 수 없고 단지 그림자와 소리를 통해서 서로를 인식할 뿐이다. 동굴은 기본적인 조건부터 정확한 인식이 불가능함을 가정하고 있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역할을 부여한다. 관객들과 배우들 모두 그 역할이 배우의 진짜 직업과 지위가 아님을 알고 있다. 연극무대에서 '진정성'을 바라는 바보는 없다. 진리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투명한 '진정성'은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요구된다. 수많은 유명인들이 그들의 '진정성'으로 인해 인기를 얻고 동시에 미움을 얻는다. 대중은 연극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배우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가면이 벗겨진 배우는 대중 앞에 끌려 나와 그가 햄릿이 아님을 고백해야 하고, 그가 리어왕이 아님을 사죄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유명인은 끊임없는 사생활의 공개에 대한 압박을 받고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경계는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제 대부분의 유명인들은 자신의 공간을 유튜브의 무대로 공개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동굴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도식
동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진짜 세계의 그림자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연극 공연이 제공된다. 불 역시 인공의 빛이다. 그들은 사실상 연극 장면에, 연극적 환영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연극, 이야기에 몰입해 있다. - <투명사회>, 한병철, 79쪽 -

동굴의 비유에 대한 도식을 보면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동굴 안은 감각의 세계를, 그리고 동굴 밖은 인식의 세계를 뜻한다. 여기서 '진정성'은 동굴 밖에서만 통해야 한다. 연극무대가 아닌 곳, 즉 공적 영역에서는 '진정성'이 통용된다. 바로 이 동굴의 입구가 페르소나가 지키는 영역이다. 개인의 의견은 페르소나를 통해 공적 영역으로 나서야 하고, 공적인 의사는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의 영역으로 내면화되어야 한다. 이 과정의 상실이 작가가 투명화'라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만약 개인의 내면이 페르소나를 거치지 않고 표출된다면 감각적 공유가 없는 계층에 대한 몰이해로 공적 영역에 혼란을 가져온다. 막말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개인의 이기적 관점이 보편성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빈자의 배고픔과 같은 감각적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부자의 낭만적 미학은 미니멀리즘이 겸손과 비움의 덕으로 귀결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빈자와 부자의 무소유는 비움이라는 결과는 같을지라도 동기와 상황, 그리고 심리적 비참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

1883년 주거의 예, <새로운 주택>, 브루노 타우트, 1924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81-1938)는 1924년 <새로운 주택: 창조자로서의 여성 (Die Neue Wohnung: Die Frau als Schöpferin)>에서 19세기 주거의 예를 보여준다. 집은 소유주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정체성으로 집안은 그임을 알 수 있는 무수한 물건들로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물건들로 채워진 집은 소유주의 부와 박식함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유용성보다 과시적 전시성에 초점을 맞춘 19세기 주택을 비판하며 타우트는 사용자 중심의 집을 강조한다. 20세기 초반 아직은 집안일이 주로 여성에 의해 행해지던 상황에서 타우트는 부엌 평면을 구성함에 있어서 실질적 이용자에 관심을 가졌다. 동시대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집을 '거주를 위한 기계(machine á habiter)'라고 주장한 것 역시 사용자 중심의 기능주의적(functionalism) 관점을 강조한 것이다.


[불투명한 투명성]

왼편: <카츠라 리큐>, 1645; 오른편: <뮐러 하우스>, 아돌프 로스, 1930

20세기 유럽의 건축가들은 동양의 건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타우트는 일본과 튀르키예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붙박이장에 주목하여 근대 건축의 미니멀한 형태를 기능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토 외곽에 위치한 별궁 카츠라 빌라는 타우트와 이후 여러 유럽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930년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는 <뮐러 하우스(Müller Haus)>에서 개방적이고 심플한 형태의 집을 보여준다. 한 비평가는 20세기 초 등장하는 하얀 벽면의 비어있는 집의 단순성은 노동자들에게는 그것을 채울 자본의 부족의 결과로, 그리고 부유한 지식인들에게는 정제된 사유의 결과로 드러나는 공동의 미학을 갖는다고 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20세기 초반의 빈부의 격차와 빈자의 공허한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대 건축은 노동자들에게 최대한의 주거의 공급을 제공하는데 일조했고 위생 문제의 해결을 통해 도시에서의 삶의 질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의 건축가이자 건축이론가 콜린 로우(Colin Rowe, 1920-1999)는 <투명성: 실재적이고 현상적인 것>에서 '투명성'이 건축 공간의 미학적 풍요로움과 인간 지각의 능동성을 고취시킨다고 주장했다. 건축에서 겹쳐 있는 벽면들은 이용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며 다음 공간에 대한 예상과 기대감을 끌어올린다. 건축 요소의 관통, 간섭, 중첩, 투과, 연장 등은 비투명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우리의 지각이 공간을 투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유도한다. 벽면은 공간의 구분이 아닌 일종의 가면(페르소나)으로서 공간과 공간의 연결을 풍요롭게 만든다.

투명사회 역시 시인이 없는 사회, 유혹도 변신도 없는 사회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인은 연극적 환상,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호를 생산하는 자, 적나라한 사실에 예술작품 Artefakten(인공물), 반사실 Antifakten을 맞세우는 자인 것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81-82쪽 -

고대 그리스 건축의 셀라(Cella)는 외부에서 보기에도 내부에서 느끼기에도 갇힌 공간이다. 비투명적인 이 공간은 실제로는 투명하다. 적나라한 셀라와 달리 텅 빈 공간을 지나가는 몇 개의 벽면으로 이루어진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의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독일관(German Pavillion)'은 투명하지만 투명하지 않다.

<바르셀로나의 독일관>, 미스 반 데 로에, 1929

근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 로에는 단순한 벽면을 이용하여 사용자의 시각적 동선을 유도하고 가상의 공간을 인지하도록 돕는다. 또한 벽면의 재료를 다르게 사용하여 단순한 평면에서의 다양한 공간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벽돌집 계획안>, 미스 반 데 로에, 1923-24

미스는 시골의 벽돌집 계획안에서 단순한 벽면을 통한 평면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분절되고 관통되고 연장되는 벽면들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공간감은 벽면과 벽면 사이의 부분적 시각적 투명성이 사용자를 '유혹'하고, 사용자의 이동에 따라 '변신'하는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시선의 변화와 관람자의 이동은 공간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투명한 근대 건축은 '인식적 세계'가 아닌 '서사적 세계'의 특성을 보일 수 있다.

<빌라 사보아>, 르 코르뷔지에, 1931

르 코르뷔지에는 <빌라 사보아>를 통해 관람자의 이동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건축의 풍경을 제공했고, 이 풍경을 감상하는 경로, 즉 동선을 '건축적 산책로(promenade architecturale)'라고 칭했다. 동굴은 풍경 속에서 산책을 할 수 있는 감각적 경험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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