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읽기 #30

폭로사회

by Homo ludens

[진실과 말 없는 진심]

작가 한병철은 루소가 살던 18세기에도 지금과 같은 투명성의 압박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고백록>에 나오는 "완전한 본성의 진실 toute la vérité de la nature"은 그리스도교의 쇠락과 더불어 종교적 믿음에 의한 고백이 아닌 공적 '탄로'와 '폭로'를 통해 공개될 수 있었다.

루소는 사람들을 향해 "똑같은 솔직함으로" 마음을 "공개"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루소가 추구한 마음의 독재다. - <투명사회>, 한병철, 88쪽 -

동시대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도덕적 행위가 이성적 판단과 그것을 행하는 자율성을 통해 실행된다고 보았던 반면, 루소는 자연상태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선함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행위로 옮겨질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는 '정언 명령', 즉 이성적 정신활동을 통해 부과되는 의무감을 따르는 것이지만, 루소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는 사회의 부패와 불평등이 타락시킨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루소는 '마음속을 일치'시키는 것이 사회를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마음속을 일치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사회를 선하게 만들 수 있을까?

만약 루소의 계획대로 마음속이 일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JEAN_LOUIS_THÉODORE_GÉRICAULT_-_La_Balsa_de_la_Medusa_(Museo_del_Louvre,_1818-19).jpg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1819

도덕적 판단은 책과 문장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구체적 상황과 사건을 다툴 때 도덕이 얼마나 모순적 상황에 빠지는지, 개인의 '솔직함'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많은 극단적 상황들에서 도덕적 판단은 '개인의 솔직함'보다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6년 메두사호의 좌초 이후의 조난 상황을 그리고 있다. 난파된 메두사호의 선장 위그 드루아 드 쇼마레(Hugues Deroy de Chaumareys, 1763-1841)는 메두사호의 잔해로 가로 8미터, 세로 15미터의 뗏목을 만들어 149명의 생존자를 태우려 했다. 뗏목을 물 위에 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뗏목을 고정하던 밧줄이 끊어지고 15명만이 항해를 지속할 수 있었다. 식량조차 얼마 남지 않았던 이들은 결국 5명의 목숨을 식량 삼아 생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식인 행위는 어떠한 도덕적 명제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희생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옳다. 그렇다면 루소의 "완전한 본성의 진실"이 드러난다면 어떨까?


Auguste_Rodin-Burghers_of_Calais_London_(photo).jpg <칼레의 시민들>, 오귀스트 로댕, 1908

사람들의 완전한 본성이 '희생'이라면 모두 저마다 희생하려 할 것이고, 그렇다면 모두가 서로를 위해 죽음을 택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희생을 원하기 때문에 희생자를 뽑기 위한 공정한 투표가 이루어져야 할까? 투표에서 선발된 이들은 희생의 즐거움을, 살아남은 나머지는 아쉬움을 느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루소의 바람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부패가 됐든 불평등에 의한 도덕적 타락에 의해서이든 사람들은 '생에의 의지'를 갖는다. 만약 모두가 '희생의 의지'를 갖는다면 인류를 존속할 힘은 사라지고 죽음에 대한 의지만 남는다. 로댕이 조각한 <칼레의 시민들>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희생자들의 '자발성'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생에의 의지'를 가질 때, 그것을 역행할 수 있는 '죽음에의 의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숭고해질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제물로 삼은 희생자들을 기리며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고, 공동체는 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발적 희생이 명맥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공동체는 미래의 위기에도 대처할 수 있다.


루소가 말한 "완전한 본성의 진실"은 희생자를 뽑는 과정에서 모두가 손을 드는 겉보기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서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 추모와 묵념이 역설적 증명일 수 있다.

루소는 연극이 투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장과 가상과 유혹의 장소라고 비난한다. 표현은 포즈가 아니라, 투명한 마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 <투명사회>, 한병철, 90쪽 -

작가가 비판하는 바와 같이 "완전한 본성의 진실"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자기기만을 통해 거짓 '진실한 마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선으로 여겨질 위험도 있다.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만으로 공적인 발언에서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쏟아내는 행위가 영웅화되는 기괴한 장면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철저한 통제는 그것이 통제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표현 자체에만 몰두하는 강박에 빠져버린다. '진심'은 그것이 말로 드러나지 않을 때 비로소 신비롭고 가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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