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읽기 #26

친밀사회 1편

by Homo ludens

[세계 극장]

작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친밀성'의 긍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친밀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데서 시작하고, 다른 것에 대한 동일화로 나아간다. 이 친밀성은 유사하지 않는 것과 명확한 경계를 세우게 되고 유사하지 않은 것과의 명확한 구분을 통해 친밀성을 높여간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유사하지 않은 것들의 동일화로 인한 부작용이, 외적으로는 상실된 원인으로 인한 원한이 발생한다. 니체는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를 통해 수평적 대립을 넘어서는 '고귀한 가치장조' 혹은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를 정의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쥘리앙(François Jullien, 1951-)은 2016년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Il n'y a pas d'identité culturelle)>에서 문화의 두 가지 사멸을 이야기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고립에 의한 사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에 동조된 획일성의 죽음이다. '동일화'는 당장의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 확정적 죽음으로 나아가는 게으른 관성일 수 있다.


작가 한병철은 극장에서 생겨나는 '연극적 거리'가 비판적, 해석적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어 친밀성 속에서의 익사를 막아준다고 주장한다.

18세기의 세계는 세계 극장 theatrum mundi이었다. 이 세계에서 공적 공간은 일종의 무대 같은 것이다. 연극적 거리가 육체와 육체, 영혼과 영혼의 직접적 접촉을 막아준다. - <투명사회>, 한병철, 72쪽 -


가장 위대한 극작가인 셰익스피어 역시 세상을 극장에 비유했다.


All the world's a stage (온 세상은 무대다.) - 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의 희극 <당신 뜻대로(As you like it)>의 2막 7장의 독백에서 주인공 자크는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다만 배우일 뿐이다. 그들은 등장했다 퇴장하고, 한 사람은 일생 동안 여러 역할을 연기한다"라고 말한다. 덧없이 짧은 생에서 인간은 주어진 몇 가지 역할을 순차적으로 수행하고 삶을 마감한다. 셰익스피어는 고대와 중세에 이미 제기되었던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고뇌를 극으로 완성시켰다.


12세기 영국의 신학자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1110년 후반 - 1180)은 '테아트룸 문디(theatrum mundi 세계 극장)'이라는 말을 만들어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폴리크라티쿠스(policraticus, 1159경)>의 3권에서 "인간의 지상 생활은 희극이며, 각자는 자신의 역할을 잊고 다른 사람의 역할을 연기한다"라고 말한다. 그의 세계관에서 희극이라는 무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며, 객석은 기독교의 낙원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얀 산레담, 1604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역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극 무대에 비유했다. 플라톤이 비유적으로 설명한 동굴의 우화는 무대와 객석의 관계를 위계(hierarchy)에 따라 배열하여 보여준다. 동굴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원래의 상(像)의 모방일 뿐이며, 상대적으로 낮은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다. 객석에 있던 원래의 상은 동굴의 벽에 비친 자신의 수많은 모방과 일치할 수 없는 간극을 갖는다. 그가 동굴 밖으로 나가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과 연못의 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관찰한 순간 동굴의 벽에 맺힌 그림자들의 존재론적 가치는 사라진다. 같은 방식으로 대낮의 태양빛과 거울을 통해 비친 모습은 이전의 상에 비해 실체에 가깝다. 하지만 어떠한 상도 원 사물의 완벽한 재현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중세에 이르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의 간극은 '바니타스(Vanitas)'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솔즈베리가 지적하듯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알지 못하고, 그것을 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고 그 답을 찾고 기다리는 존재이다. 소위 '소명'을 아는 것은 연극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아는 것이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자만이 사후에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종교에서의 은총이다. 여기서 관객은 점차적으로 절대적 객관성으로 나아간다. 동굴 안의 죄수들은 그림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객관성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동굴 밖으로 나온 죄수는 보다 높은 인식 수준으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고 높은 수준의 객관성을 지닌다. 결국 마지막에 위치한 관객은 신 혹은 진리를 인식한 철학자로 절대적 객관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절대적 객관성에서 감각은 불필요하다.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인식되는 절대적 객관성만이 진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종교적으로 이러한 절대적 객관성은 '신' 그 자체로 예외를 두지 않는 완전한 신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과 완전한 신성 사이에는 사도들의 삶(vita apostolica)이 위치하며 불완전한 인간에게 모범이 된다.


18세기에 이르러서 종교적 영향력은 약화되고 산업화로 인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개인 간의 '친밀감'은 줄어들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1936)가 주장하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가운데 이익사회의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순간 공동사회의 친밀하고 개인적이며 깊은 정서적 유대는 비인격적이고 형식적이며 기능적인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때 공동사회에서 가부장적 리더십으로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하던 것과 달리 이익사회는 공론장의 합리적, 비판적 토론의 영역이 활성화된다. 공론장에서 공동사회의 아버지는 그의 거대한 의사결정 권한이 축소되어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한다. 그가 대변하던 '친밀한' 목소리의 덩어리는 차갑게 하나의 목소리로 계산된다. 공동사회에서 그의 정체성이었던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이익사회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로 경량화된다.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크기와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다음 편 '페르소나 persona'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Las_Meninas,_by_Diego_Velázquez,_from_Prado_in_Google_Earth.jpg 왼편: <시녀들>, 벨라스케스, 1656

벨라스케스는 18세기의 '연극적 거리'를 17세기에 이미 회화에서 구현했다. 그의 대표작 <시녀들>은 기존 회화가 보여주던 모든 역할을 해체했다. 화가와 그림의 대상, 화가와 의뢰인, 의뢰인과 그림의 대상, 나아가 화가와 관객, 관객과 그림의 대상의 관계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해석의 깊이를 갖는다. 예술작품의 무대는 더 이상 캔버스 안에 국한되지 않고 화면의 바깥과 끊임없는 시각적 연관을 맺는다. 화가가 바라보는 캔버스의 외부에는 그림의 의뢰인 혹은 관객이 위치한다. 화가 앞에 세워진 캔버스에는 우리가 뒷모습으로만 볼 수 있도록 계획된 인물들의 배열이 숨겨져 있고, 화가의 뒤편에서 반짝거리는 거울에는 화면 바깥에서 관객과 같은 위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의뢰인이 드러난다. 이처럼 벨라스케스는 작품 속 인물이 갖는 역할을 화면 안에서만 국한될 때의 안정성을 파괴한다. 화가 앞의 캔버스와 공간 전체를 조망하는 캔버스는 두 개의 세계를 상징하며, 이 두 세계는 시선과 은폐를 통해 상호관계를 맺는다.


공자는 <논어>의 안연편에서 "군군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 父父 子子)"를 말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하지만 임금은 동시에 아비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하다. 신하 역시 아비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갖는 역할은 자신 앞에 누가 서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달라져야 한다. 개인이 갖는 역할이 다양한 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범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연극적 거리'는 '친밀함'에 가려진 다양한 역할의 제자리 찾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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