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에 대하여 3>
차라투스트라는 이웃에 대한 경계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와 가까이해야 할까요?
나 너희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갖도록 가르치노라. 너희에게는 벗이 이 땅에서의 축제여야 하며 위버멘쉬를 예감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웃 사랑'을 자신의 약점을 가려 상대를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동기나 수동적인 동정심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벗'은 서로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창조적인 의지를 고양시키는 상호발전적 관계라고 말합니다. 벗과의 교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삶 이후의 평안이 아닌 이 땅 위에서의 삶에 대한 긍정입니다.
나 너희에게 선(善)을 감싸고 있는 깍지로서 완성된 세계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 벗에 대하여, 언제나 완성된 세계를 선사하지 않을 수 없는 창조하는 벗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이다.
벗이 가진 '선'은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의 선 혹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집니다. 그와의 대화는 내가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수용 가능합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창조하는 풍요로운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벗은 어떻게 자신의 선을 창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일찍이 세계가 벗 앞에서 펼쳐졌던 것처럼, 그것은 다시 둥근 고리를 이루며 감겨온다. 악을 통한 선의 생성, 우연으로부터의 여러 목적의 생성으로서.
벗이 자신의 선을 만들기 전에 세계는 그에게 선과 악을 보여주었습니다. 벗은 세계가 제시하는 '악' 가운데 일부를 '악'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악'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를 파악하고 자신에게는 그것이 '선'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과학적 발견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악'이라고 여겨지는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핵 연구 과정에서 발견된 방사선 물질을 의료 영상 진단 및 치료에 사용하는 경우와 폭발물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질소 폭발물이 농업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질소비료의 탄생이 이바지하는 등 '악'에서 '선'으로의 가치 변화는 것은 '선'과 '악'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의 터널 공사를 돕기 위한 선한 의도로 발명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상용 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치의 변화, 즉 선에서 악으로 혹은 악에서 선으로 가치가 바뀌는 것은 우연적인 상황이나 발견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하나의 창작물은 다양한 목적으로 잉태됩니다.
미래가, 그리고 더없이 멀리에 있는 것이 네가 오늘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를 바란다. 너 너의 벗 속에 있는 위버멘쉬를 너희의 존재 이유로서 사랑해야 한다.
결국 벗은 '아직 오지 않은 나'를 만나도록 해줍니다. 지금의 우리는 내일의 우리를 기다리지 않지만, 내일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기다립니다. 오늘의 우리가 전해줄 변화와 창작의 씨앗을 미래의 우리가 이어받아 싹을 틔울 것입니다. 그 씨앗은 우리의 벗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조가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싹에서 시작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창작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지금의 우리는 벗을 만나 또 다른 나로 성장합니다. 우리의 '벗'에게서 어떠한 '반'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벗으로 인해 성장한 내 속에는 벗이 함께 합니다. 창조는 포괄적 사랑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는 힘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과 감정 상태에 대한 통찰력으로 최고의 초상화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화가는 자신의 삶에서 영광과 좌절의 시간을 모두 겪어내며 스스로의 모습에서 인간의 고통과 삶의 경험을 표현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림 속의 무릎 꿇은 아들은 성경의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입니다. 갖은 고생의 흔적으로 닳아버린 신과 옷을 입은 아들을 아버지는 말없이 두 손으로 안아줍니다. 그림의 오른편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형과 뒤편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 하녀들 가운데 누구도 탕자에 대해 멸시와 조롱을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과 애정으로 가득 찬 눈빛에는 삶의 시련을 겪는 탕자에 대한 포용적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버지라는 가정의 질서는 탕아의 '반'의 행동에 의해 혼란을 겪지만 돌아온 아들에 대한 포용으로 인해 예전보다 굳건한 사랑에 도달합니다. 일탈은 실패가 아닌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위한 시련이자 시작입니다. 화가는 기법적으로도 이전 세대의 거장 카라바조의 강렬한 명암 대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과 같이 흐릿하고 불분명한 경계를 어둠 속에 녹여내어 인물의 내면의 깊이와 고뇌를 표현하는 방법을 기획했습니다. 매끄러운 물감의 표면을 거부하고 두껍게 물감을 발라내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은 거친 질감을 통해 시간의 흔적을 삶의 고된 여정으로 시각화합니다. 렘브란트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과거를 거부하고 동시에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창조적 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창조는 화가 개인뿐 아니라 다양한 미술이 등장하기 위한 벗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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