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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니체 58일 차 - 두 눈을 뜬 정의?

<살무사의 기습에 대하여 2>

by Homo ludens

[모든 죄책까지 짊어질 사랑]

차라투스트라는 살무사의 악을 선의로 용서하는 대신 그가 가한 행위가 자신에게 선하게 작용했음을 이야기하며 선과 악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선의 절대적 기준은 악을 더 큰 악으로 만들고 선에 대해 초월적 권한을 주는 구조적 문제를 공고히 할 뿐입니다. 범죄자에게 주홍글씨를, 선을 행한 자에게 면책 특권을 주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까요?


알고들 있었는가? 나누어진 불의는 절반의 의라는 것을. 그리고 불의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그 불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작게나마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앙갚음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이다. 그리고 징벌이라는 것이 법도를 어긴 사람에게 의로운 것이 되지 않고 명예가 되지 않는 한, 나 너희가 하는 징벌을 좋아하지 않으련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일들은 절대악과 절대선에 속하지 않습니다. 선한 의도의 나쁜 행동 혹은 악한 의도의 선한 행동, 그리고 의도치 않은 선과 악이 섞여 있습니다. SNS를 달구는 많은 주제는 누구의 행동에 대해 옳냐 그르냐의 평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판단은 나뉘고 사람들은 편을 나누어 성향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슈가 된다는 것 자체가 절대악이나 절대선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옹호하는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과 악이라고 착각하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은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닌 기호의 문제에 놓여있습니다. 소위 '깻잎 논쟁'이라 불리는 이슈에서 이성 친구의 깻잎을 잡아주는 행위가 악이거나 선은 아닙니다. 순수한 선의일 수도 있고, 숨겨진 욕망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진심을 알고 싶은 욕망이 그의 진심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을 부추기게 되지만, 그의 행위로 진심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언제나 정확하다는 보장을 해주지는 못합니다. 누군가는 다른 이성에 대한 호의가 친절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그것이 불신의 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불편하게 받아들인 쪽이 그것이 자신에게 불편하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호의를 베푼 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상대의 행위에 불편을 느꼈다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이 이슈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느낀 자신이 있고, 그 불편이 서로의 관계에 부정적일 수 있음을 공유하는 편이 낫습니다. 불편을 느낀 사람의 요구가 인간적인 것이며, 상대가 무결점의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상대는 오히려 자신을 이해해 준 관용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가 느낀 불편함이 서로에게 선으로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요구가 절대선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는 것이 의로움을 고수하는 것보다 훨씬 고상하다.... 나는 너희의 냉혹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 판관의 눈에는 언제나 교수형 집행인과 그의 차디찬 칼날이 엿보인다.

우리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따라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뜻하지 않은 불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요구와 자신의 요구에 절대적 기준을 들이대어 냉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복수와 단죄의 정신, 즉 정의와 도덕을 절대적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라,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랑인 정의는 어디에 있지? 그렇다면 모든 징벌뿐만 아니라 모든 죄책까지도 짊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만들어내라!
그렇다면 판결을 하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무죄로 판결하는 그런 정의를 만들어내라!
Iustitia_van_Heemskerck.png <유스티치아>, 마르텐 판 헴스케르크, 1556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는 두 눈을 가려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저울에 선과 악의 무게를 달아 칼로써 집행합니다. 법적 정의를 상징하는 그녀의 공정성은 때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복잡한 상황을 차갑고 단호한 현실로 단순화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녀가 두 눈을 뜨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정의를 판단하기를 요청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하는 선과 악의 무게가 아닌, 현실의 고통과 인간의 조건, 그리고 죄의 근원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정의는 한 인간의 삶을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해서는 구현될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의 성장 배경과 과정은 그의 죄가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일탈을 유죄와 무죄로 판단하는 일은 한 인간에 대한 처벌로 끝나지만, 사회적 조건에 대한 자성과 비판은 많은 인간의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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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 에밀 뒤르켐, 1897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인간의 자살을 개인적 일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규범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아노미(anomie)에 기인할 수도 있음을 지적합니다. 뒤르켐은 사회적 연대를 창출하는 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소외(Verfremdung)는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고, 뒤르켐은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상실한 인간은 사회에서의 평가와 그로 인한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끝없는 실망과 허무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타인에게 저지르는 죄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인 자살조차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감고 판단한다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처벌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죽음을 자신 혹은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죄악에 대한 벌이라고 차갑고 단호히 말하는 종교와는 달리, 차라투스트라는 죽음 혹은 무에서 삶 혹은 생명이 생겨났음을 축복합니다. 우리의 죽음이 형벌이 아니라, 우리의 탄생이 기적이자 축복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인간을 범죄자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사랑으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무죄이며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Caravaggio_-_Cupid_as_Victor_-_Google_Art_Project.jpg <큐피드의 승리>, 카라바조, 1602

카라바조가 그린 <큐피드의 승리>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판을 이긴 데서 유래합니다. 판(pan)은 '모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남긴 시의 일부인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amor vincit omnia)"와 같은 의미에서 해석됩니다. 그림의 큐피드는 세속적 권력을 뜻하는 갑옷과 왕관 그리고 화살, 예술을 뜻하는 악기와 악보, 직각자와 조각 도구 등 인간이 만든 모든 인위적 창작물 위에 서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시대를 초월하며, 전능합니다. 큐피드의 승리는 기존의 '의로움', 즉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고, 자신의 욕망과 생명력을 긍정하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낡은 가치에 대한 사랑의 승리는 억압된 것, 죄라고 여겨지던 것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포괄적 사랑의 태도를 취합니다. 이때 우리는 개인의 선과 악이 아닌, 그들의 삶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또 다른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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