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82일 차 - 진리? 미신을 향한 의지?!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 1>

by Homo ludens

[공경하지 않는 진실]

차라투스트라는 '이름 높은 현자들'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비판합니다. 한때 자유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던 이들은 이제 기존의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이들은 대중의 신념을 '진리'라고 포장해 주며,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탐구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개들에게 미움받는 늑대처럼 민중에게 미움받는 자, 그런 자야말로 자유로운 정신이며 속박을 거부하는 자, 그 누구도 경배하지 않는 자, 숲 속에 거주하는 자다. 그러한 자를 그의 은신처에서 몰아내는 것, 민중에게 그것은 늘 "정의감"이라 불려 왔다.

대중들에게 현자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은 어려운 말을 쓰고, 불편한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본질적 요소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복잡한 이해관계들의 거대한 대결에 의해 지탱됩니다. 시대가 지날수록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더 넓고 깊은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과거의 철학자들 역시 당대에는 어려운 말을 늘어놓는 자들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대중을 선동한다는 '정의감'에 의해 독배로 사라져 갔습니다.

너희는 민중을 우러러 공경함으로써 저들의 존재를 정당화해주려 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진리를 향한 의지"라고 불렀다. 이름 높은 현자들이여! 그리고 너희의 마음은 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나는 민중 출신이다. 신의 음성도 그곳으로부터 내게 들려왔고."

하지만 이름 높은 현자라는 자들은 민중들이 원하는 현실을 수긍하기 좋도록 정당화해 주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의 신이 그들 속에 있다는 것을 설파하며 그들의 집단적 미신을 강화해 줍니다. 철학자들이 민중에게 현실에 맞서 싸우라는 괴로운 요구를 하는데 반해, 그들은 민중들이 믿고 싶어 하는 가치, 즉 전통, 도덕, 관습을 지키려는 의지가 '진리를 향한 의지'라고 말해줍니다. 현자들이 이름과 부를 드높이는 동안 민중들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고통에 익숙해져만 갑니다.

아. 나로 하여금 너희의 "진실성"이란 것을 믿게 하려면 너희는 먼저 우러러 공경하려 드는 너희의 의지를 먼저 깨어부수어야 하리라. 진실하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막으로 가 자신의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깨어부순 자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

우리는 '진실' 혹은 '진실성'에 대해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생겨납니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의 부재가 '진실'에 대한 열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얻기 위해 '진실'을 요구합니다. 상대방이 대단히 큰 믿음을 준다고 해도, 점차 그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증거는 커져만 갑니다. 상대방의 마음은 철저히 은폐된 상태이며, 의심은 '믿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자백을 요구할 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조차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신조차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우리를 허무의 공간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기존의 가치가 와해된 곳에서 진실된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발견한 가치, 우리는 그것에게만 진실할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누군가를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 즉 그에게 자신의 믿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의존적 태도를 벗어던지는 자를 '진실하다'라고 말합니다.


Caspar_David_Friedrich_-_Der_Mönch_am_Meer_-_Google_Art_Project.jpg <바닷가의 수도승>,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808-10

독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고전적 회화의 비례를 깨고 극단적인 화면의 분할을 보여줍니다. 구름으로 가득한 바다 위의 하늘은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어둡고 무거워집니다.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다는 얇은 띠와 같이 늘어져있으며, 솟아오른 듯한 하얀 모래 언덕은 아슬아슬한 해안선을 그려냅니다. 모래 언덕의 꼭대기에 갈색 승복을 입은 수도승이 생각에 잠긴 듯 바다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수도승은 신의 피조물인 위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하게 신의 은총과 지상의 어두움을 수용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자각은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숭고함을 드러낸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허무주의자들은 신에게 버림받은 수도승의 절망감을 실패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이라는 정치적 맥락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한밤중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해도, 그 너머의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해하거나 헤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만한 자만심으로 당신은 스스로 후세의 빛이 되어 미래의 어둠을 밝히겠다고 상상합니다! 신성한 것은 오직 직관만이 믿음 안에서 보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명확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황량한 모래사장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부드럽게 남아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네 흔적은 사라지네. 허영심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자여! - 요하네스 슐츠에게 보낸 프리드리히의 편지中, 1809년 2월 -

프리드리히는 '오만한 자만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이름 높은 현자들'은 진리의 세계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헛된 말들은 바닷가의 바람이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입니다. 이 수도승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떠올리시나요? 수도승에게서 신에 대한 두려움과 의존감을 느낀다면 관찰자는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공경하지 않는 독단자로서 허무의 바다 앞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의 질문과 해답을 가진 자를 떠올린다면 그는 진실로 '진실성'을 지닌 자일 것입니다.


다음 콘텐츠는 매주 월요일 무료로 공개되며, 멤버십 구독을 통해 전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전 22화매일 니체 81일 차 - 아름다운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