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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Aug 09. 2022

할머니의 여름휴가


새벽 한 시, 아이의 열두 살 생일이 지난 지 한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친구를 초대해 파티다운 파티를 한 아이는 한껏 놀다 잠이 들었다. 잠든 얼굴에도 미소가 희미하게 남은 걸 보니 파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나의 하루도 고요히 물러간다. 다만 물난리가 난 듯한 생일파티의 잔해를 오롯이 치워낼 수 없어 미련이 남는다. 아쉬운 대로 조용히 치울 수 있는 것들만 추리고 불을 끈다. 새벽 한 시, 내게도 긴 하루의 끝이 찾아왔다.


아이의 생에 숫자 하나가 축적되는 날, 생일밥에 마음을 담아 아이 앞에 펼쳐질 삶을 축복한다. 찹쌀이 섞여 찰기 있는 쌀을 서너 번 헹구고 밥을 안친다. 불에 단 냄비에 참기름을 두른다. 숭덩숭덩 썬 소고기를 넣어 볶다가 물에 불린 미역을 쫑쫑 썰어 넣고 달달달 볶는다. 국간장 한 국자를 두르고 굵은소금 한 꼬집을 뿌린다. 미역에 간이 배게 볶아주고 냄비 가득 물을 부어 팔팔팔 끓어오르면 중간불로 40분가량 은은하게 끓여낸다. 미역국이 끓는 동안 양파와 당근, 표고버섯을 채 썰어 각각 볶아낸다. 삶은 당면을 찬물에 헹구고 간장과 설탕을 넣은 뒤 약불에 조린다. 5cm 간격으로 썬 생부추와 볶은 야채를 당면과 한데 넣고 참기름을 두른 후 참깨를 쏟듯이 뿌려 버무린다. 생일날 미역국보다도 꼭 먹어야 한다는 면요리, 잡채가 완성됐다. 서걱서걱하게 볶아진 야채와 달짝한 간장물을 머금은 당면을 비율 좋게 젓가락 가득 들어올린다. 입 안 가득 국숫발이 차오르고 두 입술에 참기름이 반질거린다. 운 좋게 참깨를 씹으면 팡파르가 터진다. 입 안에서 잔치가 펼쳐진다. 잡채는 잔치다.


할머니는 잡채를 좋아하셨다. 이가 몇 개 남지 않아 오래오래 되새김질하듯 씹어야 했지만, 내가 해 간 잡채를 한 접시 뚝딱 잡수셨다. 잘 드시는 모습에 마음이 좋아서 계절마다 잡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할머니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다르게 흘렀다. 겨울의 할머니는 잡채 한 그릇을 뚝딱 잡수셨다. 봄의 할머니는 잡채를 들, 잡채를 입에 넣을, 잡채를 씹을 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빈손으로 와도 되니 자주만 오라던 겨울의 할머니가 바쁜데 부러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섬약한 말로 봄을 보냈다. 얇은 돈봉투에 면죄부를 쥐어 주더니 계절 행사 같은 드문 방문에도 기어이 면죄부를 쥐어 주셨다.


내 아이의 생의 한 해가 오롯이 채워진 다음 날 할머니는 떠나셨다. 새벽 한 시, 내가 어질러진 집 안을 대충 청소하고 긴 하루의 끝을 매듭짓던 그 시각 할머니는 생에 매듭을 지었다. 이제 여름이 한창인데, 이 여름의 절정이 오기도 전에 할머니는 먼 곳으로 이른 여름휴가를 떠나셨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여든 번의 계절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십 년 전에 찍은 칠순 사진이 천장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계절을 지나고 해를 넘기며 할머니의 시간을 축적해왔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고봉밥이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올려졌다. 두어 달을 수액만 맞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혼이 고봉밥을 양껏 퍼 올릴 수 있을까. 장례식이 이어지는 동안 몇 번의 제사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빈소와 손님상의 경계에 서서 지켜만 보았다. 내 할머니인데 시집간 맏손녀에게는 상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내 할머니인데 조의금을 얼마나 할 것인지를 질문받았다. 내게로부터 어쩐지 이방의 기운이 물큰하게 풍겼다. 물론 말을 했으면 상복을 받을 수도, 원한다면 빈소 밖 가벽에 붙어 제사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런 피상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술잔을 돌리는 대신 숟가락 가득 밥을 담아 향 위로 돌리고 싶었다. 국에 밥을 말아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한없이 갖다 대고 싶었다. 나는 배고픔이 악귀처럼 할머니에게 들러붙지 못하게 쫓아버리고 싶었다.


할머니를 빈소에 두고 손님상에 앉아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흰쌀밥, 육개장, 수육, 오징어무침, 장조림, 멸치볶음, 김치, 마른안주, 떡, 과일까지 한상이다. 상차림만 보면 잔칫상과 다름없다. 전날 차린 아이의 생일상과 다른 게 무엇일까. 생일과 죽음이 한 끗 차이다. 할머니의 장례식 밥상이 아니었다면 신나게 먹었을 음식들이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먹었다. 국도 한술 떠먹었다. 한 끗 차이에 목이 가득 멘다.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간 막내 고모가 내가 앉은 자리로 찾아왔다. 미국식 포옹으로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30년 만에 보는 막내 고모는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 내 기억 속 단 한 번의 만남. 열 살 무렵 나는 할머니를 따라 서울에서 미국 남자와 살고 있는 막내 고모 집에 갔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집, 내 키만 한 침대, 식탁과 의자들, 하얀 시트가 덮인 소파, 물 대신 펩시 콜라, 히피펌의 긴 머리카락, 길고 뾰족한 빨간 손톱. 본 적 없는 신기한 것투성이인 그곳에서 나는 빨간 손톱의 환대에 울고 싶었다. 막내 고모는 신데렐라의 새엄마처럼 세련되었고, 무서웠다. 그때의 거리감이 30년이 지난 밥상에서도 재현됐다.


“반갑다. 옛날에 너 본 적 있어. 근데 너 할아버지 뵈러 몇 번 오니? 너희 엄마는 몇 번 오니?  나 여기 2주 있는 동안 너희 엄마 한 번 봤어. 할머니, 할아버지 잘 모셔야 되는 거 아니니? 너희 아빠 죽었어도 너희가 장손이잖아. 큰오빠는 똑바로 못했어도 너희는 잘해야지.” 미국식 포옹은 가짜였다. 막내 고모는 내가 더는 숟가락을 들어올릴 수 없도록 책무를 난사했다. 정겨운 '상주 말'이 넘치는 장례식장에서 막내 고모의 '서울 말' 같은 말투는 공기를 깨트렸다. 큰고모는 밥그릇을 내 쪽으로 바짝 밀어주며 막내 고모를 만류했다. 자주 와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챙긴다고 초라한 치적을 내세워주었다. 쌀밥 위에 모래가 뿌려진 것 같았다. 모래 섞인 밥알이 목구멍을 할퀸다. 물 대신 받은 콜라 때문에 울고 싶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콜라의 탄산 알갱이에 밥알 한 톨 한 톨이 업혀 목구멍을 긁었던 그날이 다시 펼쳐졌다. 밥을 남기면 할머니한테 혼이 났었는데 밥을 삼킬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이제 없고 나는 할머니를 애도할 겨를도 없게 되었다. 앞에 앉은 고종사촌 언니가 조용히 맥주를 따라주었다. 맥주에서 오줌 맛이 났다.


막내 고모가 가진 큰오빠에 대한 원망을 이해하기에는 나는 그녀의 삶을 모른다. 그녀가 언제 왜 미국으로 떠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녀도 아빠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우리의 지난한 삶을 모를 것이다. 그리하여 아빠를 잃은 마흔의 조카를 엄마를 잃은 예순의 고모는 힐난하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밥을 왜 큰언니가 챙기니? 벌초를 왜 둘째 오빠가 하고? 셋째 오빠가 할아버지 병원 모시고 다니는 거 이상하지 않니? 할아버지 집 명의는 네 동생으로 되어 있다며.” 광활한 미국에서 온 고모에게 할머니와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사는 엄마의 드문 방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빠가 집을 날릴까 봐 할아버지 집이 동생 앞으로 되어 있는 것을, 엄마가 할머니 집에 가기 위해 몇 군데 일을 빼야 하는 것을 고모는 알지 못한다. 보통 때는 무능하고 술을 마시면 유해했던 아빠는 엄마에게 늙은 부모를 떠넘기고 떠났다. 그럼에도 고모에게 우리는 아빠를 책임져야 했고, 또 아빠의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부당하지 않았다. 내 할머니이므로. 내 할아버지이므로. 무능하고 유해했지만 내 아빠이므로. 친척들 사이에서 섬처럼 늘 유리되었지만 부당하지 않았다. 다만 아빠를 감당해본 적 없는 막내 고모에게 생의 대부분을 아빠를 감당하는 데 쓴 우리를 힐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빠가 죽었을 때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마음에 ‘안심’ 한 조각이 박힌 것을 안다. 막내 고모는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을 나와 꼭 닮았다는 목소리로 발산했다. “이제 돈 달라는 사람도 없으니까 맛있는 거 먹고 편하게 사세요.”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장례식 내내 환청처럼 들러붙던 힐난의 목소리는 이미 땅에 묻힌 아빠를 기어이 파냈다. 무능하고 유해했지만 그조차 더는 볼 수 없는 아빠이므로 나는 들쑤셔졌다. 아빠가 죽었을 때 할머니는 그래도 아깝다 하셨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할아버지가 셋이 있었는데 그 밑으로 아빠가 먼저 묻힐 줄은 몰랐다고 우셨다. 할머니의 솜옷이 향에 그을려 구멍이 나는 줄도 모르고 앙상한 손으로 아빠의 영정사진을 쓸며 우셨다. 이제 할머니는 그래도 먼저 가서 아깝다던 아빠 뒤에 묻히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심으로써 죽은 아빠를 다시 품게 되었다.

여름이 한창이다. 할머니는 여름휴가를 가듯 떠나셨다. 노르스름한 삼베 천에 싸인 할머니는 작은 동박새 같았다. 9남매의 맏이였던 할머니. 아들보다 어린 남동생이 있고, 딸보다 어린 시누이가 있는 할머니. 겨울에도 냇가에서 19인분의 빨래를 했다는 할머니.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맏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이자 맏며느리로 쉴 새 없이 몸을 놀려야 했던 할머니. 고단이 형상화된 듯한 육체는 여기 두고 혼만 홀홀히 휴가를 떠난 것이라 여길 참이다. 4년 전 화려한 색색의 종이에 싸인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공작새 같았다. 동박새는 공작새를 만나 그동안의 간극을 한껏 메우고 있을 것이다. 내년 여름이 되면 나는 할머니의 제사상에 잡채를 올릴 작정이다. 참기름과 깨를 양껏 뿌려 고소하고 반질반질한 잡채를. 할머니의 휴가가 비로소 잔치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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