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맥주병을 땄다. 목도리를 두르듯 왼손으로 맥주병 입구를 감싸고 오른손에 든 숟가락을 병뚜껑의 톱니 사이에 끼웠다. 어느 톱니가 숟가락을 받아줄지 섬세하게 살폈다. 톱니와 숟가락이 빈틈없이 맞물렸다는 느낌이 왔을 때, 가차없이 파고들었다. “뻥!” 갇혀있던 탄산이 분출했다. 동시에 오븐의 타이머도 ‘땡’하고 울린다. 이것이 사람의 귀에 가장 기분 좋게 들린다는 ‘솔’의 음역일까. 청량한 소리에 죄책감은 잠시 미뤄두었다. 해야 할 일도 함께.
그렇다. 맥주병을 딸 때가 아니었다. 내일은 2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독서 모임 날이다. 당장 읽어야 할 책이 50여 쪽이나 남아 있었고,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내용을 요약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2주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요약은커녕 다 읽지조차 못한 책이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였다. 밤 아홉 시. 맥주병과 라면땅을 담은 쟁반에 책은 탁자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맥주는 시원했다. 할머니 집 마당의 항아리에서 퍼온 겨울밤의 동치미처럼. 하얀 사발에 한가득 담아 온 동치미 국물을 입도 떼지 않고 들이켜던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살얼음이 낀 동치미가 시원하다고 했다. 시큼한 얼음물이 어째서 차갑지 않았을까. 그날 밤은 아빠도 하기 싫은 일을 미뤄둔 밤이었을까.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스프를 찍은 라면땅을 씹었다. 다시 맥주 두 모금으로 생라면의 잔해를 삼키는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근심은 무엇이고 죄책감은 또 무엇인가 싶다. 온종일 발바닥을 동동 구른 이유가 무엇일까 싶었다. 포기는 순식간이다. 내일 아침, 나에게는 한 시간 반의 여유가 있으니까. 책의 남은 50쪽을 읽는 데 30분, 줄 쳐 놓은 부분을 중심으로 리뷰할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 한 시간. 충분하다. 믿는 구석이 생기는 순간 포기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치우면 밤 열 시. 넉넉히 남은 오늘의 시간. 어쩌면 책은 오늘밤에 다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유로운 계획, 푸근해진 마음에 죄책감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한 것일 뿐이니까.
머릿속 계산에 변수가 생겼다. 라면땅은 삼분의 일이나 남았는데 맥주병이 비었다. 바삭한 라면땅을 버릴 수는 없었다. 100%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라면땅을 수분 없이 섭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을 마시면 라면을 끓여 먹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야밤에 끓인 라면이라니. 당치 않다. 할 수 없이 김치냉장고에 가서 맥주 한 병을 더 꺼내왔다. 아홉 시 이십 분. 시간은 아직 이쪽에 있다. 숟가락으로 다시 한번 지렛대의 원리를 실행했다. “따각.” 청아한 뻥 소리는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분 좋음’ 게이지는 차오른다. 연료가 차오르듯 맥주를 부을수록 기분 게이지는 GOOD 쪽으로 화살을 보낸다.
맥주 두 병과 생라면 한 봉지, 그리고 감자 과자 한 봉지를 마지막 소금까지 콕 찍어 빨아 먹었다. 시간은 열 시. 계산에 오차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정확히 분배한 스스로에게 감탄할 찰나 볼이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눈앞이 희부윰했다. 텔레비전의 동적인 형형색색 사물은 잘 보이는데 책 속의 정적인 흑백 활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해야 할 일의 유예. 그렇다면 시간은 내일 아침 한 시간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생라면을 먹었는데 아침의 몰골은 끓인 라면을 먹고 잤을 때와 비슷했다. 눈두덩이는 밥솥 안에 넣어둔 호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손가락은 새로 탄 목화솜 같았다. 반지가 손가락을 옥죄지만 않았으면 호사스러운 손이라 생각할 정도로 탐스러웠다. 땡땡한 눈꺼풀은 눈알을 지그시 눌렀고, 반지는 전족처럼 손가락을 바싹 조였다. 탄수화물의 반란에 대응할 시간이 없었다. 뜨이지 않는 눈으로 서둘러 아이들의 아침밥을 차렸다. 식탁 위에 아이들이 가져갈 수저와 물병을 챙겨 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아악~ 엄마 추워. 추워. 우리 학교 가고 나면 청소해~!”
“안돼! 엄마도 지금 아니면 청소할 시간이 없어. 참아 봐!”
조급한 마음은 자비가 없다. 아이들은 잔뜩 웅크린 채 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나가는 것도 목소리로만 배웅한 채 청소를 마쳤다. 아침 여덟 시 삼십 분. 예상보다 삼십 분을 더 썼다.
책상에 앉아 남은 부분을 펼쳤다. 앞부분의 기억이 두 덩이 정도 도려내진 듯 하얬다. 예상 밖의 변수.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 왼쪽에서부터 사선으로 훑었다. 부옇던 장막이 조금씩 걷혔다. 남은 부분이 50여 쪽이라 쉽게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주옥같은 내용이었다. 보통 책의 5부는 에필로그 같은 느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책의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지성과 감성을 모두 쏟아부은 듯했다. 평소에 동경하는 작가였다. 작가가 털어 넣은 지성 가루를 차분히 쓸어 담고 싶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십 분. 십 분이 부족해서 마음이 조여온다. 조급한 마음은 가루를 흩날리고 만다.
십 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시간을 쪼개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것도 해야 할 일이 되면 숙제로 변한다. 숙제는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다. 성실하지만 게으른 나는, 숙제는 하기 싫지만 하지 않을 대범함은 없다. 다만 최대한 미루는 것이다. 숙제를 최대한 미루다 처리하기 위해 시간을 계획한다. 시간을 임박하게 쓰는 병이다. 이 질환은 시험 기간에 정점으로 발현됐다. 나흘 동안 하루 세, 네 과목을 치르는 중간, 기말고사. 시험 일정이 발표되면 시험 공부량을 일주일 단위로 계산했다. 그러나 암기과목 공부를 시험 날짜와 최대한 가깝게 배정하면서 실제로 공부를 시작하는 날짜는 밀리고 밀렸다. 암기과목이 아닌 과목은 없었으니까.
암기과목 덕분에 애초의 계획이 우습게도 시험공부는 늘 벼락치기였다. 시험 기간 동안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정해진 시험 범위와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주어진 시간. 밀리고 밀린 계획을 다시 시간을 쪼개 밀어 넣었다. 밤을 새운다는 조건을 더해 쪼갠 시간의 칸마다 계획은 빈틈없이 들어찼다. 그러나 변수는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인간은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외운 것을 금세 잊는다. 설령 밤을 새우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시험 범위를 정성껏 완독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다. 밤의 시간, 책상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지만 끊임없이 가루를 흘린다. 조여오는 시간의 압박에. 나도 모르게 밀려드는 졸음에. 애당초 시험공부란 평소에 미리미리 해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침해가 떠오르는데 아직 공부하지 않은 페이지가 열 쪽 가까이 남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시험과 시험 사이, 쉬는 시간 십 분뿐이다.
십 분의 미학은 쫄림이다. 심장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쉴 새 없이 두근거린다. 심장이 쫄려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울 시간이 없다. 십 분 동안 일 분에 한 페이지씩 열 쪽을 반드시 외워야 한다. 한 번 읽어볼 것은 하늘색 줄, 중요한 것은 노란색 동그라미, 반드시 외워야 할 것은 빨간색 별표로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는 벼락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시간 계획이 시작됐지만, 십 분의 쫄림병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만성질환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며 생애주기를 함께 난다.
결국 책의 앞부분만 정리한 채 모임에 나갔다. 책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다.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씨네 21>에 기고한 영화평론을 묶은 책이다. 영화의 담론을 작가의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소양을 섞어 풀어냈다. 책에 소개된 영화 중 보지 않았거나, 관심조차 없었던 영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작가의 해석을 따라가는 길은 현현했다.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하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작가의 신념을 바탕으로 ‘생산된 인식의 깊이’는 심해를 유영하는 듯했다.
독서 모임에서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해서 발표했다면 수미쌍관의 미학이 펼쳐졌을 것이다. 회원들에게 이 책의 진면목을 좀 더 유려하게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형철 작가는 장승리의 시, 「말」에 나오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라는 구절이 작품이 해석자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고 했다. 좋은 해석과 더 좋은 해석 중에서 가장 좋은 해석을 해달라는 작품들의 요구. 숙제를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한 나의 리뷰는 골다공증 환자의 뼈 같다. 십 분만 더 있었더라면. 십 분의 미학은 늘 후회로 종결된다. 배 속에서 라면땅이 부풀어 오른다. 소화 불량은 만성질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