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사원 테를 미처 다 벗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열심히 준비해서 아이디어 발표를 하고 나오는 길, 선배 하나가 그 아이디어를 자기가 해보겠다며 준비한 자료를 모두 자기에게 넘기라고 말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미처 거절의 대답을 하지도 못했는데, 내 자리로 와 빨리 자료를 보내 달라고 독촉하는 선배의 말에 정신없이 자료를 압축하고 메일을 보냈다.
자료를 다 넘겨 놓고 주위가 잠잠해지니 그제야 이건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이 밀려온다. 나는 왜 거절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가. 나는 왜 바보처럼 자료를 다 넘겨버렸는가. 그래 놓고는 이렇게 또 혼자 속을 끓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참을 혼자 속을 끓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그래, 나는 회사의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회사를 위해선 맞는 일이야 라고 말이다.
[에피소드 2] 작년의 일이다. 남편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는 회사에 경조휴가를 냈다. 3일간의 휴가기간 동안 남편의 외갓집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장례식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회사로 복귀했더니, 팀장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야. 나는 전달만 하는 거야. 처장님이 그러시던데 요즘 애들은 왜 휴가를 쓰면서 와서 보고를 제대로 안 하냐 그러시던데, 혹시 휴가 가기 전에 인사 안 드리고 갔냐?”
순간 정말 당황스러웠다. ‘아니, 누가 경조사 휴가에 보고를 하고 가요?’라고 되묻고 싶어 입술을 달싹여보지만, 그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또 바보처럼 이렇게 대답하고야 말았다. “네, 경황이 없어서요… 사전에 보고를 못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회사를 다니며 정말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 많은 에피소드들을 다 기억했더라면 어쩌면 난 벌써 퇴사를 선택했었지도 모를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이렇게 종종 속을 끓이게 되는 날이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날엔 마음이 맞지 않는 상사나 선배 때문에, 또 어떤 날엔 부서 간 이해관계나 각자의 상황 때문에 속을 끓이기도 한다. 그것 말고도 많다. 녹아들 수 없을 것만 같은 건조한 사무실 분위기가 힘겹고 갑갑하게 다가올 때도 있고 어떤 동료의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가 비수가 되어 마음에 박힐 때도 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한 가지 좋은 점은 건조한 사무실 분위기나 사소하지만 유쾌하지 못한 농담 한마디 정도에는 쉽게 기분이 오락가락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순간적으로 화가 나기도 하고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지만 한바탕 달리고 나면 금세 털어버리고 이내 상쾌한 기분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마음이 몹시 좋지 않은 날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날에 난 정말 평소보다 더 열심히 달린다. 집에서 나설 때부터 오늘은 ‘분노의 뜀박질이야’ 하며 아예 작정을 하고 나선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말이다. 하루키와의 다른 점은 그는 거리에 중점을 두지만 나는 거리보단 속도에 중점을 둔다.
나의 분노를 닮아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템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늘 달리던 곳을 달리다 보면,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금세 이르고 만다. 몹시도 나를 화나게 만든 그 존재나 상황에 대해 더 이상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의 한계를 시험하며 평소보다 빠른 상태로 달리고 있을 때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호흡은 금세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리듬감 있게 내딛는 스텝 또한 흐트러질게 뻔하니까 말이다.
매일 같은 거리를 달리지만 그런 날엔 늘 달리던 거리가 훨씬 더 길고 멀게만 느껴진다. 마음속에서 ‘힘들어’에서부터 시작해 ‘그만 뛸까? 그만 뛸까? 그만 뛸까?’라는 목소리가 아우성 되다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저기 까지만 가보자’가 반복된다.
중간에 멈추든 목표로 했던 거리를 완주하든 일단 멈추어 서고 나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만큼 지친 상태가 되고 만다. 땀은 뚝뚝 떨어지고 눈은 따갑고 숨은 너무 헐떡거려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감출 수가 없다. 그렇게 한바탕 제대로 뛰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제야 속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든다.
당당히 아이디어를 내어 놓으라 요구하는 선배도, 얼토당토않은 보고 얘기를 해대는 팀장님과 처장님도 여전히 밉다. 하지만 무엇 하나 바뀔 것이 없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는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상황을 넘겨버리려는 나 스스로에게 대한 화는 조금 풀린다. 신기한 일이다. 더불어 최근의 달리기 최고 기록도 경신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나의 좋은 기록이 올라가면, 그날은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오늘이 바로 회사에서 뚜껑 열릴 뻔한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