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는 8살 무렵 미국에서의 1년 살았던 기억을 나에게 종종 이야기 헀다. 마당 뒤로 사슴이 뛰어다니고 푸르른 잔디의 운동장이며 지금에서야 흔해진 가전제품이나 코스트코와 같은 기업들과 환경을 이미 경험했었다며 그 시절의 아름답고 즐거웠던 기억을 나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미국에 가본 적이라고는 미국령인 하와이와 괌 정도인데 미국 본토의 경험이 없다 보니 그 이야기가 너무 미화해서 하는 이야기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나에게 가장 아름답고 즐거웠던 여행지인 필리핀 보라카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맞섰다.
8살 아이가 미국 1년의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일까? 8살의 와이프는 그 당시 1년의 경험으로 아직도 아직도 훌륭한 R 발음과 P 발음을 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입에서 단어와 문장은 내가 더 많이 쏟아 내지만 내가 못 알아듣는 영어를 와이프는 척척 알아듣는다. 미국 생활과 더불어 편집증처럼 디즈니 만화 영화를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반복해 본 것도 한몫했다고 한다. 미국 생활에서 얻은 건 영어 발음뿐만이 아니다. 그 나이에 미국이라는 세계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사는 곳 사는 방법에 대한 생각의 제약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런 경험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19살까지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감히 내가 어떻게라는 생각의 벽이 크게 드리우고 있었는데 와이프 덕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꿈꾸고 아이들에게도 그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에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며 모았던 적금을 털어 리마인드 신혼여행이 아닌 미국행을 택했다.
미국의 장벽을 낮춰준 건 와이프의 고모덕이었다. 젊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미국에서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시고 아이를 낳고 이제는 은퇴하실 나이임에도 아직도 일을 하신다. 세탁소를 운영하시면서 집도 사시고 자식들도 키우셨다. 그 고모를 뵈었던 건 몇 년 전 한국에 오셨을 때였다. 고모의 얼굴에는 평온과 미소가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여름 아이들과 와이프 그리고 장인어른이 고모 집으로 유학을 갔다. 고모가 다니시는 한인교회에서 하는 썸머스쿨에 한 달가량 다니게 되었다. 썸머스쿨이 끝나갈 무렵에 맞춰 광복절을 끼고 9일간의 휴가를 내고 나도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 미국을 갔다. 드디어 미국이라는 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보다 미국에서 주문한 배송 요청 품목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치, 미숫가루, 김, 약 등 내 짐은 백팩 하나였는데 배송물품을 담은 캐리어는 두 개나 되었다.
밤 12시 무렵이 되어서야 고모 집에 도착을 했다. 간단히 짐을 풀고 잠을 잤고 시차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는 루틴대로 일어나 구글맵에서 찾아놓은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 트랙에 가서 달리기를 했다. 땀이 쏟아질 정도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고모가 트랙을 걷기 위해 오셨다. 내가 뛰고 있는 것에 놀라시면서도 반가워하셨다. 여전히 고모는 환하고 인자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전형적인 미국식 목재주택은 세월을 거쳐 고모가 주무시는 안방과 아이들이 지냈던 방의 문틀이 변형돼 문이 닫히지 않았다. 그 틈새를 타고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찬양을 부르시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집을 나서 운동을 하고 집에 오면 주방에 홀로 앉아 휴대폰으로 찬송가를 틀어놓으시고 조용히 사색을 즐기시고 계셨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한 달가량 본인의 집에 기거하게 해주시고 먹을 것과 탈것들을 내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고모는 일터인 세탁소로 향하셨다.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자 집 여기저기 손볼 것을 고치기 시작했다. 틀어진 문틈을 톱으로 갈아 맞추고 뒷마당 데크도 수선하고 그렇게 집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고모는 아들과 둘이 사신다. 딸은 결혼해 독립을 했다. 고모부는 아들이 대학 무렵이었나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빈자리가 크셨을 텐데 고모는 묵묵히 세월을 버티어 내셨다. 아들이 고모부의 부족함을 채워주면 좋겠지만 와이프 동갑내기 사촌인 아들은 자신의 삶이 우선이다. ‘김씨네 편의점’에서 보았던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현실에서 보게 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한국과 다른 미국 문화에서 자라다 보니 집에 오면 한국 문화를 강요하지만 집 밖에 학교와 사회는 미국 문화이다 보니 거기서 오는 갈등에 지금도 아픔이 느껴질 만큼 큰 성장통을 겪었다고 했다.
가끔 고모가 생각이 난다. 보이진 않지만 고모의 루틴 한 일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새벽에 일어나 찬송가를 부르며 성경공부를 하시고 출근 준비를 마치신 뒤 잠시 물 한 잔과 사색을 하시다가 출근을 한다. 하루 종일 세탁소에서 일을 하시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식사를 하시고 때로는 수요예배를 때로는 드라마를 보시고 주말엔 교회를 가실 거다.
코로나 이후로 종교와 신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그나마 나일론이던 교회생활은 멀어진지 오래다. 하지만 고모를 생각하면 신이 정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친 세월에 주님이 없었더라면 고모가 이겨내 실수 있으셨을까?
고모부의 부재를 채워줄 종교가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밤 11시즘 미국은 시간이 오전 10시쯤 될 거라며 고모 자식들의 SNS에 새로 올라온 사진과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는 와이프를 보니 나도 고모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