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21 3일차
오늘도 역시나 술 마신 것을 후회한다.
어제 승원이는 바로 잠이 들었고, 나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자서 몸이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더부룩한 속과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승원이는 역시 꿋꿋이 일어나서는 내가 깨는 안 깨지는 슬 눈치를 보더니 사부작사부작 준비를 한다.
와이프가 그랬다.
“승원 오빠 올라왔다가 자고 그 담날 새벽에 바로 가겠고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농담인 줄 알았던 북한산을 간단다.
항공편이 지연될 정도로 며칠간 비가 너무 많이 왔다.
그래서 산 일부 구간이 통제되고 낙석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뉴스에 여러 번 나와서 걱정이 됐다.
“날씨와 경로는 체크했냐?” 물었는데 역시나 이놈은 불도저다. 비는 뚫겠다고 했고 정릉 능선 무엇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이미 이놈의 결심을 굳게 섰기 때문에 밀고 나갈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북한산에 가보고 싶었다. 다만 그 녀석보다 많이 떨어진 추진력과 용기덕에 ‘비가 와서 다음에’라는 핑계 대고 있었다.
부랴부랴 테무에서 산 트레일 러닝 배낭을 꺼내고 짐을 꾸렸다.
캠핑 때 쓰던 비옷도 챙기고 신발은 더울지 몰라도 혹시나 해서 등산화를 신었다.
다행히 가랑비가 내렸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정릉으로 향했다.
경로 검색을 해보니 정릉보다 백운대 최단 코스인 우이동이 시작점으로 나은듯했다.
그곳으로 향하자는데 승원이는 역시나 나를 믿지 않았다.
그래도 정릉에서 하차하지 않고 우이동북한산입구역까지 갔다.
가는 동안 핸드폰으로 경로를 뒤적거리며 혼자 구시렁 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데크길에 다다르는 등산로 초입까지 왔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나도 고집을 내어 밀어붙였다. 승원이가 역정을 내었지만 그런 그 녀석의 행동은 이젠 익숙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시골에 있는 작은 중학교였다.
각 면/리에 하나씩 있던 초등학교 3곳의 학생들이 모이는 중학교였다.
사람은 몇 안 됐지만 중학교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갔던 그곳에서 오승원은 1학년 신입생들 중에서 덩치가 크고 까불거리던 모습을 하면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153cm의 작고 왜소한 나를 둘러메고 돌리다가 교실 문틀에 머리를 부딪혔다.
나는 그 장난에 너무 화가 나서 그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내 주먹을 피하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진 그놈은 나에게 미안하다며 괜찮냐고 했다.
그 녀석이 먼저 장난을 쳤지만 그래도 덩치 큰 그놈에게 두들겨 맞겠나 싶었는데..
나에게 괜찮냐며 사과를 했다.
우린 그렇게 절친이 되었다.
늘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하는 행동은 패턴이 있었다.
생각은 짧게 실천은 무모해 보일 정도로 과감했다.
오늘의 등산도 그간 장마로 인해 일부 구간은 통제가 될듯해 보였고 과연 비를 맞고 간다 하더라도 입산이 가능할지 몰랐지만 그 녀석은 그런 전후사정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의 추억들은 늘 그래왔다.
엉뚱하면서도 무모했던 도전을 했다.
그 녀석에게 비는 낭만의 요소였다. 새로운 술안주가 될만한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나도 느꼈다.
산을 오르며 보통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데, 그 녀석에게는 묵언수행과 다름이 없었다.
매일같이 달리기를 했던 나와는 달리 승원이는 체중이 많이 불어 있었고 그간 운동을 한 적이 없어서 많이 힘들어했다.
가방이 무거우니 집에 두고 나오자고 했지만 산행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려고 고집했던 그 녀석은 그 무거운 짐을 고스란히 메고 왔다.
말 안 듣고 무겁게 가방을 짊어지고 스스로의 고행길을 나아가는 그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가방이 짐이 되었지만 그 무거운 짐도 날씨도 그 녀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들이 지금보다 어린 시절 육아를 마치고 나면 밤 10~11시가 되었다. 혼자 공허히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산책을 하곤 했었다.
그때 승원이에게 전화 종종 했다. 너의 자유가 부럽다고 하면 나는 대신 네가 가진 거보다 없다. 라며 답을 해주었다.
자유를 위해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지만 물질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자유로웠던 시골 촌놈들이었던 우리에게는 등산을 갈 때 등산화도 배낭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악산 793미터의 산을 가면서도 등산화가 아닌 한 켤레뿐인 매일 신던 운동화를 신고 자유시간 초코바 하나와 물이 다였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혈기와 객기로 오르던 산은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제약사항이 해결되어야만 오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오늘 비가 왔어도 막무가내로 가자고 했던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곰탕처럼 뿌연 정상에서
흘러가는 구름 속에 잠깐 드리우는 멋진 산 아래의 풍경을 누리지 못했을 거다.
그 녀석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함과 자유분방함이 비 오는 북한산으로 나를 이끌었다.
다양한 별명을 지어주긴 했지만 오크라테스라는 별명이 생각이 난다.
나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늘 자기의 세상 속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졌던 그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듯 농담을 하고 그 철학에 말싸움을 거는 건 나뿐이었다.
대학시절 어두운 터널 속에 끝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순간마다 옆에서 나를 이끌기보다 마이웨이를 시전 했던 그 녀석은 ‘이게 답이다’라기보다
그냥 내 옆에서 조용히 묵묵히 있어 주는 좋은 친구였다.
근래 최애하는 청와옥 순대 국밥을 끝으로 보내는 길에도 그놈은 “순댓국의 잡내가 내장을 안 쓰고 머리 고기를 써서 그렇다.”면서
“그래서 마진율이 높겠네.”라며 나의 최애 집에 대해 최대한 스크래치를 내려는 시도를 하고 떠났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을 많이 알아가게 되는 거 같다.
더 이상 하룻강아지는 아니게 된다. 덕분에 무서운 것도 많아지고 생각도 많아지며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비록 배낭은 나보다 더 무거운 걸지고 올라갔지만 ‘갈까?’ 하는 생각으로 저 멀리 김제에서 올라와서
북한산 백운대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그 녀석의 모습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자유시간을 얻은 나에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려주고 홀연히 내려간 승원이 녀석.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