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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길 1 20화

방안 퉁소

by 최연수

어렸을 적에 아버지로부터 가끔 ‘방안 퉁소(洞簫)’ 또는 ‘이불 활개’라는 말을 듣곤 했다. 몸은 가냘프고 마음은 여린 데다가 숫기가 없는 아들이 오죽 못 마땅했으면 방안에서만 피리를 불고, 이불속에서만 호랑이 잡는 녀석이라고 빗대었을까? 그런 말을 듣고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일제 때인데 도 입학하기 전 아버지로부터 언문을 익혔고, 편지도 받아써서 남들로부터는 영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2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그런데 왜 일본어에 서투냐고 선생님의 핀잔을 받았다. 선생님의 질문에 가까스로 손을 들었다가도, 그의 눈길이 가까워지면 슬그머니 손을 내리곤 했다. 지명할까 두려워서였다. 해방이 되자 갑자기 한글을 배우게 되었다. 칠판에 씌어있는 한글 낱말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일어를 잘하여 칭찬을 도맡아 듣던 친구들이 벙어리처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바보인 내가 섣불리 아는 척하다간 비웃음거리가 될 게 아닌가?

가마․거미․고기․구두․그네... 가 모두 무슨 말인가? 손을 들고 그대로 읽었다간 무안당할 게 뻔했다. 아예 모른 척 자라목이 된 채 선생님 눈치만 살폈다. 가매․거무․괴기․구두․군지... 그래야 맞지. 이렇게 전라도 사투리밖에 알지 못한 내가, 서울 표준말을 알 턱이 없었다. 그때 만약 표준어를 알고, 능숙하게 읽어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면 일약 영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기회는 그렇게 지나가고 방안 퉁소로 굳혀졌다. 남들과 달리 이렇게 알아도 모른 척, 할 수 있어도 못한 척했다. 내향성으로 소심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손이 떨려서 그랬지, 어디 겸손해서 그랬을 것인가?

IQ 173인데 선생님이 73으로 잘못 기록해, “너는 결코 학교를 마칠 수 없으니 장사를 배우라는” 핀잔을 받았다. 이렇게 17년 동안 바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있다. “잃어버린 17년, 그동안 숫자에 속고, 무시하는 선생에게 속고, 세상에 속았다”라고 고백한 천재다. 곧 빅터 세리브리아코프(Victor Serebriakoff)인데, 어느 날 국도를 달리던 중 옥외 광고판에 나오는 수학 문제를 풀게 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후에 천재들만 가입할 수 있는 국제 멘사(Mensa) 협회장까지 되었다. 이렇게 IQ 173만큼의 능력이 있어도 73만큼의 삶을 사는 일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반전이 되었다. 1년 독학으로 재수하는 동안, 강의록을 통해서 중학 과정을 예습한 게 굳건한 터전이 되었다. 선생님의 칭찬과 학우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어깻죽지도 펴지고 목에 힘도 주어졌다. 전화위복으로 나도 잃어버린 14년을 되찾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독서를 좋아하면서부터 철들기 시작했다.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른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열매 많은 가지는 휘어진다’ ‘잘 익은 곡식은 고개 숙인다’ 이런 속담과 격언들을 잡기장에 쓰면서, 겸손이 미덕이란 걸 가슴에 새겼다.

재주가 많고 두뇌도 명석하다는 평판을 들으며 약간 우쭐대며 학교를 졸업하였다. 사회 초년병치고는 언뜻 보기에 성공 가도에 접어든 듯한 착시 현상도 생겼다. 그런데 뜻밖에 눈코 뜰 새 없이 고난과 역경이 나를 옥죄기 시작하였다. 호사다마란 말을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며, ‘내민 돌 정 맞는다’는 속담이 나에게 들어맞는 것인지 곰곰이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모른 게 엄청나게 많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면 할수록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가슴에 새긴 겸손이라는 단어가 이제 머리 위로 올라와 고개를 짓눌렀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주 할 때, 가장 힘든 곳이 후미라고 한다.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빠른 속도로 후퇴하여 아군의 손실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노나라 맹지반(孟之反)은 그 어려운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맨 뒤에 본국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지만, 그는 ‘후미를 맡을 자격이 없는데 말이 지쳐서 앞으로 달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겸손했다. ‘맹지반 불벌(孟之反 不伐)’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고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자연이 장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을 살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성인은 이런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오히려 앞서게 되고 자신을 보존하게 되고, 능히 그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는 자연의 운행방식을 따라 통치하면 저절로 백성들이 순응하게 된다면서, 겸손의 통치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도덕경에,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빛날 수 없고(自見者不明),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는 돋보일 수 없으며(自是者不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自伐者無功),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다(自矜者不長)고 하였다.

한편 조선조의 명 재상인 맹사성의 일화는 유명하다. 19세에 장원급제하고 갓 스물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그의 자만심은 어떠했겠는가? 어느 날 禪師(선사)를 방문하여 선정을 베풀기 위한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하라는 상식적인 말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선사가 녹차나 한 잔 하라며 다시 자리에 앉히고, 잔이 넘쳐 방바닥에 적시도록 차를 따랐다. 몹시 불쾌하여 소리를 지르니까 “찻물 넘치는 건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건 어찌 모르십니까?”하고 일갈했다. 面愧(면괴)스러워 서둘러 방을 나서려다가 이번에는 문틀에 이마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선사는 “고개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라고 조용하게 말했다. 이를 계기로 맹사성은 자만심을 버리고, 謙讓之德(겸양지덕)을 몸에 익히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원래 거드름 피는 사람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올챙이 적 시절 잊어버리고 나도 한 때 으스대려고 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몽둥이로 등허리를 두들겨 맞고, 채찍으로 목덜미를 얻어맞았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기다시피 두 손 들고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의 인격은 곧 겸손이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예수를 통한 겸손(빌 2:1〜11)이었고, 성 어거스틴(Augustine)도 기독교의 제1 신조가 겸손이며, 제2 제3의 신조도 역시 겸손이라 했다는 것이다. 겸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사람이 홀로 있을 때의 자기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반드시 외부 사람들을 향한 행동에서 나타내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노자의 도덕경 21장에, 반듯해도 남을 해치지 않고(方而不割), 청렴하되 남에게 상처 입히지 않으며(廉而不劌), 곧아도 교만치 않고(直而不肆),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는다(光而不耀)는 말이 있다. 빛나기는 쉬워도 번쩍거리지 않기는 어렵다.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너무 번쩍거리면 꼭 뒤탈이 따른다는 경구이다. 빛이 나지도 않은 내가 어찌 번쩍거리랴.

상처 난 조개가 진주를 만들고, 상처가 난 돌은 구르고 씻겨 수석이 되며, 굽은 소나무가 산소를 지킨다고 한다. 방 안에서라도 퉁소를 부를 수 있고, 이불속에서나마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것만도 천만다행히 아닌가? 아버지의 말이 서운했지만, 일찍이 점은 잘 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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