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새우타령

by 최연수

길이 좁아지고

나무들이 작아지고.

하늘이 좁아지고

구름이 작아지고.


나무 구름이 만나는 곳.

하늘 땅이 맞닿은 곳.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점 하나.


이내 사라질 이 점을

차마 지우지 못해.

붓끝이 이렇게

가냘프게 떨리나보다.


이 점이 이 세상 끝인가?

이 점이 나인가?

이 점이 사라지기 전에

뚫고 나가지는 못할까?




국민학교 시절. 작문부에서 동시 ‘가로수’를 써서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두 줄로 서서 遠足(원족=소풍)간다는 내용이다. 멀리 앞장 선 작은 나무들이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산모퉁이를 돌아선다는 표현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이 아니라 글로 원근법을 나타낸 셈이다.

복지관에서 한국화(水墨畵)를 배우면서, 원근법에 拘碍(구애)받지 않은데도, 그런대로 韻致(운치)가 있었다. 그런데 서양화(水彩畵)를 배우면서는 다시 원근법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스케치 단계에서 消失点(소실점) 찾기가 기본이다. 15c.초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건축가 브루네레스키가 원근법의 기본 원리는 소실점이라 했다. 2차원 평면에 입체적으로 원근을 나타내는데, 모든 사물들이 멀어지면서 점점 작아진다. 물론 땅과 하늘마저 점점 좁아진다. 그러다가 한 곳에 이르러 모두 만나 하나가 되는데 이게 소실점이다. 면적도 없는 작은 점이기에 글자대로 이내 사라져버린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팔순을 지나 먼 길을 걸어왔다. 때로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때로는 눈 바람 을 막아주던 나무들도 함께 걸었다. 비를 내려주던 구름도, 밤 하늘을 수 놓던 별들도 나를 감싸주면서 걸었다. 길벗이 되어 이렇게 지금까지 함께 걸어 왔는데, 반갑게 서로 얼싸안는 순간 한 점으로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그리 고 뒤돌아볼 새도 없이 이내 사라져버린다니....

영화 레옹 (1994년)에서 소실점이 등장한다고 한다. 뿌리 없이 떠도는 킬러 레옹이 어두운 복도를 걸으면서도, 그가 향하는 곳은 활짝 열려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다. 이곳을 지나가면 새 삶이 시작되기에, 열린 문이 희망의 상 징이요 이 소실점은 그에겐 復活点(부활점)인 셈이다. 우리도 어둡고 긴 터널 을 지날 때는, 소실점인 출구를 지나면 다시 환한 세상이 펼쳐질 것을 기대 하면서 지루함을 견디지 않는가? 예술 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 (Rudolf Arnheim)은 저서 ‘미술과 視知覺’에서, ‘소실점은 강한 역동적 효과를 낳아, 線(선)들이 숨가쁘게 焦點(초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미지를 형성하여, 나아 가 초점을 뚫고 무한히 앞으로 전진하는 공간을 만든다’고 하였다.

지금 나도 그림을 통해 소실점 앞에 서있다. 人生無常(인생무상)을 느낄 게 아니라, 이 점을 통해서 새로운 빛이 새어나오고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지리라는 소망을 가진다. 花盆(화분)을 들고 있는 레옹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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