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금단의 열매

새우타령

by 최연수

봄.

은은한 풋나물 향내로

콧방울이 벌름거린다.

입 안에서 군침이 돈다.


여름.

된장을 찍은 맵싸한 풋고추가

눈물을 촉촉하게 자아내도

입 안을 환하게 한다.


가을.

소금물에 침담근 풋감이

떫은 맛은 가시고

단감 같구나.


겨울.

온갖 푸성귀와 열매들이

장마당 한 자리에 모여

제 잘난 모습을 뽐내는데,


한물 지난 찌그렁이들이

싱싱하게 무르익었노라 하는구나.

설익은 풋나기들도

잘 여물었노라 하는구나.


먹으면 배탈 날 것 뻔한데,

게눈 감추듯 한다.

속는 것인지 속아주는 것인지...


(2023. 4. 25)




봄 들머리에서 꽃보다 먼저 나물을 기다렸다. 곧 나물은 봄의 전령사(傳令使)이기 때문이다. 살림에 쪼들렸던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 누나와 함께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봄 나물을 캤다. 버들개지가 아직 보송보송한 털옷을 벗지 못한 이른 봄, 쑥을 비롯해서∙냉이∙씀바귀∙꽃따지∙두릅∙고사리∙곤드레∙취나물...이것으로 국이나 나물 무침을 해 먹으면 그 은은한 향내로 콧방울이 벌름거리고, 그 연한 촉감에 입 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그 어떤 요리보다 더 맛있었다. 지금도 봄 나물을 먹어야 봄맞이를 한 것 같다.


여름이 되면 으례 밥상에 풋고추가 오른다. 제대로 된 찬거리가 마땅치 않아, 흔히 상치 쌈이나 된장∙고추장을 찍어 풋고추를 먹으면서 끼니를 때웠다. 때로는 약 오른 고추를 먹다가 눈물 흘리며 재채기를 하였지만, 입안을 환하게 하는 맵싸한 맛과, 탱탱한 것을 아삭아삭 씹는 촉감이 그런대로 좋았다. 잘 익은 빨간 고추 맛과 비교할 수 있으랴.

가을 문턱 앞에 서면 채소들이 고갱이 차고, 갖가지 열매들이 노릇노릇 물들기 시작한다. 이따금 태풍이 휘몰아치면 풋감들이 떨어진다. 농가 어느 집에도 감나무 몇 그루는 서있는데, 마당도 감나무도 없는 우리네는, 이 때 이웃집 감나무 밑에 떨어진 풋감을 주워다가 소금물에 침담갔다. 며칠 만에 꺼내면 떫은 맛이 우러나서, 마치 단감 마냥 먹을 수 있었다. 궁상(窮狀)맞은 모습이지만 우리 조무래기들에겐 즐거운 일거리요 한낱 놀이였다.

겨울이 되면 온갖 푸성귀와 열매들이 장마당에 모여든다. 울긋불긋 잘 익은 것들이 가게 한 자리에 모여, 미인대회마냥 뽐내며 선보인다. 그런데 한물 지난 찌그렁이들이 싱싱하게 무르익었노라고 시치미뗀다. 설익은 풋나기들이 잘 여물었노라고 지껄인다. 심지어 앙상한 솔 이파리도 봄나물인 척 한다. 이렇게 장꾼들의 눈과 귀를 그럴싸하게 속인다. 봄나물도 풋고추도 풋감도 아닌 것들이...소화불량은 물론 장염∙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데 아랑곳없다. 속는 사람 잘못이지 속이는 사람 잘못이라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하와가 그만 죄를 짓고(창3:6)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우리도 이 금단(禁斷)의 열매를 사 먹고 있지나 않은지...

keyword
이전 19화꽃대궐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