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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들에 익은 곡식

아내 팔순기념집

by 최연수

어린 시절 어촌 船艙(선창) 가에서 잠깐 살았지만, 농촌에서는 살지 않았다. 小邑(소읍)으로 이사온 후 줄곳 도시에서 살았기에 농촌 생활을 잘 모른다. 그러나 농촌 외가에 종종 갔기 때문에, 일손이 모자라 사철 바쁜 농촌 생활과, 비지땀을 흘리며 힘겹게 농사짓던 일을 눈여겨 보았다. 서툰 솜씨지만 밭매기․모내기․소몰이도 해봤다. 아버지께서는 일제 시대에 삽․괭이 따위를 집어던지고, 톱․대패를 들고 小木匠(소목장) 일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겐 땅 대신 하늘을 쳐다보며, 낫․호미대신 책과 붓만을 들도록 했다.


살림에 쪼들려 늘 허기진 우리들은, 외가에 가서 보리꽁밥이라도 넉넉하게 먹고 고구마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손이 닳도록 일에 찌들었던 농촌 출신들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데, 나잇살이 들어 눈에 아련한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있으니... 내가 좋아 부르는 노래, 즐겨 그리는 그림, 자주 쓰는 글...농촌이 배경이거나 농사 짓는 일이 많다.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추수감사절에 어김없이 부르게 된 이 찬송은 추억의 날개를 펴도록 한다. 11월은 아내의 귀빠진 날이 있는 달이요, 농촌은 가을걷이가 한창인 달이다. 평생 장사만 했던 아내는 이런 추억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간접적인 체험이라도 하라고 한 폭의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다. 벼를 베고, 나뭇짐을 짊어진 남정들, 빨래를 하고, 물을 긷는 아낙네, 감을 따는 아이들...모두들 바쁘지만 평화로운 가을 농촌의 모습을 보니 어떤가? 황금 벼는 물결치지만, 마음은 호수 같이 잔잔해지지 않나? 혹시 소 닭 쳐다보는 격이 되면 어쩌나?

결혼하고나서, 화초 가꾸는 일에 분주한 나를 아내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사하느라 눈코 뜰새 없었던 아내였기에, 싱싱하게 자라는 나무와 곱게 핀 꽃들을 보면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새 세상을 바라보도록 한 것인데... 이따금 나더러 농사짓느라 바쁘다고 비아냥 아닌 비아냥을 했제?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십 평생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정다워 이렇게 화초를 정성껏 돌보고 있다. 아마도 어렸을 적 농삿일의 추억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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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여! 이 그림으로나마 농촌 풍경을 상상해보시라요. 몸과 맘이 바쁠 때 일수록, 오히려 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땀을 식히며 느긋하게 한숨을 돌리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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