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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와 오얏나무

아내 팔순기념집

by 최연수

멧새는 산에서 살았다. 우거진 숲속 나뭇가지마다 내가 쪼던 부리 자국과, 잎사귀마다 부벼댄 얼굴 자국이 남아 있지. 바위 틈새로 흘러내린 골짜기와 옹달샘의 맑은 물에도 또한 내 옛 모습이 어른거리지. 멧새는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들판이 궁금했다. 그곳 푸른 풀밭에도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철따라 변하는 색깔과 아름답게 피어나는 온갖 꽃들과, 탐스럽게 열리는 열매들! 이런 걸 구경도 못한 채 산에서만 산다는 게 따분한 게 아닌가?

두 눈이 빛나고 날개에 힘이 생겨, 멀리 날아가고픈 생각이 났다. 게다가 이제 보금자리도 마련해야지 않나? 가보자! 엄마 아빠는 푸른 벌판을 가리켰다. 거기는 걸리적거리는 것 하나도 없는 곳이라고. 그래서 후르르 날아 어느 푸른 풀밭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아닌게아니라 풀밭은 참 부드러웠다. 그러나 맘껏 뒹글고 멋대로 부리를 쪼기에는...그래서 잠깐이나마 머무르려다가 이내 떠났다. 順草(순초)라는 고향 동갑내기에 장가가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뿌리쳤다. 스무 살 갓 넘은 어린 풋내기에겐 벅차고, 그리고 있었던 화려한 상상화를 지워야만 하겠기에.

멧새는 서른이 넘어 모처럼 어느 버드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연못가의 버들은 푸른 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는 게 아닌가? 산속 나무 못지않게 튼튼하게 보였다. 살며시 가지에 내려 날개를 접었다. 여기에 둥지를 틀까? 이리재고 저리재다가 다시 날개를 폈다. 혼담이 있은지 10년 만에 직장 동료 楊(버들)양과 데이트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뒤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 食禽擇本(식금택본)이라고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앉는다 했지.


텃새인지 철새인지, 이리 저리 날아다니다가 어느 이른 봄 문득 눈에 띈 한 나무를 눈여겨 보았다. 화사한 복사꽃이 만발했지만, 수수한 하얀 꽃이었다. 배꽃은 흔히 보았지만 이 꽃은 처음이다. 오얏나무 꽃이라고 했다. 오얏나무라니? 자두(紫桃)는 맛있게 먹어봤지만 자두꽃이 곧 오얏나무 꽃인 것은 처음 알았다. 오얏나무라면 大韓帝國(대한제국) 황실의 상징 아닌가? 대단한 꽃이다. 앞뒤 살필 것 없이 여기에 둥지를 틀자. 그래서 전주 李(오얏이)씨 집안 처녀를 맞아 드디어 1970년 4월 2일 결혼을 했다. 꽁지가 짧은 멧새에 지나지 않지만.


* 높을 최(崔)는 메 산(山)과 새 추(隹)로 이루어진 글자로서, 隹는 꽁지가 짧은 새의 뜻이다. 그러므로 산새는 곧 멧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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